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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홍 꽃빛같이 어여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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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혜정 작성일2018.02.21 조회3,6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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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 방면 선무 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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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산홍이 만개한 도장에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주말이면 엄마의 손을 붙잡고 걸어 다니는 어린 친구들의 해맑은 미소를 꽃의 아름다움에 비길 수 있을까? 오손 도손 어머니와 대화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다들 웃고 있지만 그들만의 사연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겠지? 2년 전 나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 당시 나는 큰 수술을 하고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살려보겠다는 심정으로 내 손을 잡고 도장으로 들어오셨다. 매일 사시 기도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르내리며 그 힘듦으로 오히려 죽을 것만 같았다. 꼭잡은 어머니의 손으로 전해지는 체온이 딸자식 하나 살려보겠다는 찐한 사랑으로 느껴졌기에 내가 먼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 어머니는 참으로 일찍 시집을 오셨다. 지금도 나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꺼낼 때면 부끄러우신지 얼굴이 붉어지신다. 그 때의 어머니 얼굴은 영산홍 꽃처럼 예쁘셨다. 그런 소녀 같은 분께서 나와 남동생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어린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힘에 붙여하는 어머니를 안쓰럽게 생각한 할머니께서 나를 데려다 키우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남매 중 맏이시고 나는 집안에서는 첫 손녀였다.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삼촌과 고모들은 내가 너무 예뻐서 서로 안아주려고 했다고 한다. 할머니 댁에서 커야 했지만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큰삼촌, 큰고모, 작은고모, 작은삼촌 등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사람은 참 욕심꾸러기인 것 같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친구들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학교에 오는 모습을 보며 뭔가 모를 허전함이 밀려오고 마음 한 구석에는 부모님과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어린 녀석이 뭘 알았을까? 때론 골방에 엎드려 많이 울기도 했던 것 같다.

 

이런 내가 안쓰러워 방학이 되면 할머니께서 얼른 부모님댁으로 보내주셨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 그때 뿐이었고, 방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아쉬움에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은 더 애잔했다. 그때의 내 모습은 초등학생의 해맑음이 아니었나보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할머니의 권유로 초등학교 3학년부터 부모님의 곁에서 살게 되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당연히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은 이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지 못할 것이다. 드디어 내가 세상의 일부분이 된 것 같았다. 이 나날을 지킬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모님과 동생에게 정말 잘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온전히 가족의 구성원으로 정착해 가고 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아버지의 큰 그늘에 기대고 있던 어머니는 갑자기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버렸다. 우리 가족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공황상태로 몇 날 며칠을 지내야 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동생은...

 

우리 집의 웃음꽃이 언제 피었었냐는 듯 어두움의 그림자가 밀려왔다. 가족이 함께 경영하던 레스토랑 운영이 힘들어져 문을 닫아야 할 지경까지 가게 되었고, 어머니께서도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밖으로만 도셨다.

 

그 당시 어머니와 나, 동생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때의 힘든 모든 상황을 서로의 마음이 다칠까봐 내색하지 않은 채 가슴 한 곳에 묻어버렸다. 어릴 때 시집을 와서 늘 아버지에게 기대고 있던 어머니는 다시 어린 소녀가 된 것 같았고, 동생은 그런 어머니와 나에게 기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맏이로서 가장으로서 자리를 채워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너무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난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나 하나를 추스르기에도 힘든 사춘기소녀였다. 집의 분위기도 싫고, 공부도 그 어떤 것도 하기 싫었다. 이렇게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언제나 모범적이던 내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삶이 무의미해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살면 뭐 하나, 죽으면 그만인 걸.’ ‘죽으면 죽는다고 미리 이야기해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언제 죽을지 알고?’ 이런 생각들로 가득했다. 그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보다는 해답을 찾지 못하는 질문들에 혼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 같다.

 

집이 너무 싫어진 나는 20살이 되자 다른 지역으로 취업을 해서 나와 버렸다. 객지생활에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때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아플 때도 많았고, 그럴 때면 그냥 좀 아프다 말겠지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정말 죽을 것 같이 아프고 배가 뒤틀려 방바닥에서 배를 쥐어 잡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런 나를 친구가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또다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말을 들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병원에 입원을 하고 병실에 누워있는데 만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상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때의 나는 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다. 다시 내 머릿속은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되었고, 가족과 모든 것들에 대해 죄스러움이 밀려왔다. 죽을 힘을 다해서 내가 내 자리를 지켰다면 지금의 나는 이렇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오자 내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이제 나의 병이 우리 가족에게 큰 상처와 부담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픈만큼 성장한다고 했던가, 예전의 아픔을 알기에 다들 또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때는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면, 지금은 우리 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새로운 뭔가를 시작하는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수술을 성공리에 마치고 퇴원하는 나의 손을 잡고 어머니는 여주본부도장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나의 병을 완쾌하게 해달라는 소망과 함께 매일 내 손을 잡고 기도를 모시러 영대를 향해 걸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온기와 희망이 나의 손으로 전해져왔다. 나의 삶도 우리 가족의 삶도 새롭게 시작하는 것 같았다. 꽃같이 어여쁜 우리 어머니가 삶의 시련을 밖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인의 마음으로 맞서 싸우려는 모습에 가슴 한 구석에서 묘한 뭉클함이 밀려왔다.

 

내 나이 서른이지만 이제야 사춘기를 벗어나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세상 사는 이치를 깨닫고 바른생활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즘은 진정한 가족 구성원으로 참다운 수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아 행복하다. 가끔 내 스스로가 대견해 보일 때도 있는데, 우리 어머니는 오죽하실까?

 

상제님의 진리 안에서 가족의 평화와 사랑이 충만해졌고, 나 또한 영글어져 가고 있다. 이제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내 자리를 충실히 지켜갈 수 있는 튼튼한 뿌리를 내리도록 열심히 수도해 가야겠다. 영산홍꽃길로 오고가는 저 아이들의 손에도 그 온정이 있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를 지어본다.

 

<대순회보 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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