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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의 길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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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혜연 작성일2018.02.24 조회3,8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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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방면 교무 이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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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짜증이 나는 하루였다. 아무런 이유 없이 안절부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고, 물을 마시려다가 아끼던 유리컵이 손에서 미끄러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업무를 대충 정리하고 조금 빨리 퇴근을 했다. 집으로 오는 중에도 가슴은 이유 없이 솜 방망이질을 했다. 집 앞에 들어선 순간 뭔가 ‘싸’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당의 수도 옆 양동이는 넘어져 있었고, 마루 옆에는 낯익은 슬리퍼 한 짝이 뒹굴고, 활짝 열려 있는 방문이며, 방에는 어지럽게 찍혀 있는 낯선 신발 자국들. 뭔가 큰 일이 일어난 흔적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것이구나 하루를 온통 혼란스럽게 만든 감정의 정체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다.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있는데 옆집 아주머니께서 오셨다. “얘야. 네 아버지가 쓰러졌단다. 119가 다녀갔는데 민중병원으로 간다더라” 마음이 갑자기 천길 아래 낭떠러지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아버지께서는 이미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셨고, 면회조차 되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엄마는 엄마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담당의사를 만나는 일이며, 지방에 있는 오빠와 언니, 다른 친척들에게 연락을 하는 일이며, 방면의 선감께 연락 드리는 일들이 고스란히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담당의사는 경과를 지켜보자는 말로 위로할 뿐이고, 경황없이 병원에 도착하는 친척들에게 아버지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도, 그들의 잠자리며 식사를 챙기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들이며, 망연자실 앉아 있는 엄마를 챙기는 것도, 스물다섯 나에게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다행이 방면 수임선감께서 병원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의 식사를 챙기라 하셨다며 어릴 때 ‘이모, 이모’ 하고 부르던 담당선감이 차로 밥이며 국이며 끼니를 해서 나르셨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삶이 아닌 죽음의 길로 점점 더 가까이 가고 계셨다. 담당의사는 이제 더 이상 치료하는 건 무의미하다 했고, 아버지는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한 채 인공호흡기를 통해서 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의식이 없다는 선고를 받은 아버지 면회를 들어가면 다른 가족들이 부르는 소리에는 묵묵부답 반응이 없던 아버지는 내가 “아빠, 아빠” 하고 부르면 감겨 있는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움직이곤 했다. 아버지는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의식이 있고, 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기존의 치료법은 이미 늦었고, 마지막으로 임상실험 중인 방법을 써 보자고 했다. 가족들과 친척들은 아버지를 임상실험의 대상이 되게 할 수는 없다며 퇴원을 결정했다. 엄마는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가야겠다고 하셨다. 집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오던 그 밤. 병원의 복도와 주차장의 전경들, 집 앞 골목, 마지막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던 의사의 모습과 아버지의 사망시각을 담담하게 선언하던 의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 아버지는 그렇게 나에게서 떠나가셨다.

 

아버지는 태극도 시절부터 도를 닦으며 지방에서 포덕사업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도전님께서 감천 태극도장에서 서울 중곡동으로 이궁 하셨을 때는 수반들(태극도 때는 내수. 외수라는 말 대신 수반이라고 했단다)은 남겨둔 채 어머니를 포함한 몇몇 임원들만 도전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중곡동 도장 공사를 받들었는데, 1970년 구천상제님 화천치성을 중곡도장에서 모신 다음날 내가 태어났다. 그 당시만 해도 몇 가지 부정을 가릴 때라 내가 하루나 이틀 먼저 태어났으면 아버지는 도장공사에만 참여하고 정작 치성은 모시지 못할 뻔 했다고 한다. 도전님께서 이야기를 전해 들으시고는 ‘영특한 아기’라 하시며 쌀과 미역을 하사해 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내게 이 이야기를 해 주실 때마다 “도전님께서 내려 주신 쌀과 미역을 받은 너는 상제님의 일을 꼭 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5, 6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미장이였다. 아버지께서 일을 나가실 때 나는 꼭 문 앞에서 “안녕히 다녀오세요.”라는 인사를 드렸는데, 혹 아버지께서 “오냐” 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가시면 울며 불며 맨발로 문밖을 따라 나서곤 했단다. 그럼 할 수 없이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다녀오세요.” 인사를 받고 “오냐.” 하고 대답을 해 주셔야 했고, “산도과자 (그 당시 최고의 인기였던 모 제과 회사의 과자) 사오세요” 하고 말씀 드리면 또 “오냐” 하고 대답을 하신 다음에야 대문을 나설 수 있었다고 한다. 저녁에 아버지께서 과자를 사 가지고 오셨는지 아닌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울면서 아버지를 따라가던 어린 내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집은 중곡도장에서 용마산 더 위쪽에 있는 ‘긴고랑’이라 불리는 동네였다. 아차산과 용마산 한줄기인 용마봉 사이의 골짜기 마을로 계곡의 길이가 2km정도 되는 곳이라 ‘긴골. 진골’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다가 ‘긴고랑’이 되었다 한다. 지역이 꽤 넓은 데도 불구하고 이 동네는 무조건 ‘산1번지’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72번지’가 되었는데 이렇게 주소가 바뀌는 것도 도수에 있는 것 같다. 태극도 도장이 있는 부산 감천동이 무조건 105번지 인 것처럼 말이다. 중곡도장 반대편 용마산에는 동양 최대의 석조 채취장이 있어서 그 아래 마을을 ‘돌산’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명은 지금은 불리지 않고 현재는 여기에 인공폭포를 조성해 ‘용마돌산공원’이라는 이름만 남아있다. 이 마을에도 부산에서 도전님을 따르던 도인들이 많이 살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던가. 도인이 모두 아차산으로 소풍을 간 적이 있다. 그곳이 지금의 ‘아차산 생태공원’ 자리인 것 같다. 대부분 도인들은 긴고랑과 돌산에 살고 있었으므로, 도인가족의 소풍은 그야말로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와 동네 언니 오빠들과 친구들과의 나들이였다. 그 소풍의 기억이 아주 단편적이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의 장기자랑에 어른들이 흥겹게 노래를 부르던 모습도 생각나고, 친구들과 보물찾기를 하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지금은 내게 그 추억이 단짝 친구와 찍은 한 장의 스냅사진으로 남아 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도인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긴고랑 집에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가려면 중곡도장을 지나가게 된다. 그때는 도장에 늘 공사가 있어서 도장에 가면 일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자주 볼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도장은 낯선 곳이 아니라 나에게는 무척 친근한 곳이었다. 도장이 신명으로 가득 찬 곳이라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르던 철부지 때라, 일부러 등교 길에는 중곡도장 남문으로 들어가서 일주문으로 나오고, 하교 길에는 일주문으로 들어가서 남문으로 나오곤 하였다. 어느 날 친구 두엇을 데리고 일주문을 들어서는데 초소에서 어떤 남자분이 무슨 일이냐며 나오셨다. 나는 당황했지만 친구들에게 도장 구경을 시켜주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서 “우리 아버지는 교감인데요” 하고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아버지 성함을 물어보고는 특별히 친구들에게 도장안내를 해 주겠다고 하시면서 성진관 이층에도 올라가게 해 주시고, 종각에서 종을 치는 모습도 설명해 주셨다. 그때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뿌듯해지며 무척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소풍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던 어린이대공원이나 아차산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쯤이라 기억된다. 아차산 팔각정으로 가을 소풍을 가게 되었다. 그때는 한참 중곡동이 재개발 되고 있을 때라 주택공사가 많았다. 아차산 아래로도 빌라단지 건설이 많이 있었고, 미장이던 아버지는 때 마침 아차산 바로 아래 동네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친구들과 떠들며 지나가다가 아이들 소풍소식을 듣고 일부러 나와 보던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시멘트 먼지에 덮인 머리와 후줄 그리한 아버지의 옷차림. 나는 순간 아버지를 외면하고 말았다. 어떻게 소풍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또 친구들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점심시간이 되었고 나는 도시락을 싸 들고 다시 산을 내려와서 아버지가 일하고 계시던 곳으로 찾아갔다. 아버지께 김밥도시락을 내 밀었더니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김밥 두어 개를 드시곤 천원 지폐 한 장을 주시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철없던 내 맘을 알고 계셨을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머리가 조금씩 커져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수도인 아버지 모습은 그저 가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대순진리회에 대한 방송을 보게 되었다. ‘집을 나간 어떤 주부가 대순진리회를 믿더라. 아마 종교 갈등 때문에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나간 것 같다’는 식의 보도내용이었다. 그 방송을 보면서 ‘그럼 대순진리회는 사이비종교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보도내용의 진실여부를 가리기에는 너무 어렸던 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과 방송을 빌미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의 종교생활에 대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가끔 방면의 수임선감께서 우리 집에 들러 “아이를 저렇게 놔두면 어쩌냐.”고 걱정을 하시면 “그냥 놔두라.”고 하신 것이 전부다.

 

나는 천주교의 맹신자가 되어 봉사활동이며 청년활동이며 적극적이었고, 천주교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하는 가톨릭 교리신학원에 입학했다. 그런데 뭔가 내 안에서 소리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성서를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원전이라 할 수 있는 『70인역』(처음으로 구약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을 각 지역 교회가 시대에 따라 선별해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70인역』에 있던 몇몇 문헌들이 가톨릭교회로부터 경전성 부족의 판정을 받고 성서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과,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트리엔트 공의회(1546년) 등을 통해서 가톨릭 신앙에 필요한 성서 목록이 확정지어졌다는 것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신앙의 원천인 성서가 공의회를 통해서 선택되거나 이단으로 가름되고 그 해석의 권위가 오직 교회에 있다는 선언은 내게 큰 혼란이었다. 믿음에 대한 근본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신학원을 졸업하고 두 달 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장례절차며 모든 것이 막막한 내게 방면의 수임선감께서는 직접 나를 데리고 다니시며 장지를 결정해 주셨고, 장례식에 필요한 차량뿐 아니라 도인들의 정성이라며 부조금을 주셨는데 그때만 해도 도인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방면에서 왜 아버지의 일에 그렇게 물심양면으로 신경을 써 주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야 방면의 선각자에 대한 예우(禮遇)였음을 알게 되었지만.

 

삼우제를 지내고 며칠 후 나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서울 관악산 정상에서 5명의 서 있는 부처를 보았다. 부처란 늘 앉아 있는 모습으로만 봐 왔지 서 있는 부처 즉 미륵불은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꿈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했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수임선감께서는 당장 차를 주선해 우리 가족을 전북 모악산 금산사로 견학을 보내셨다. 금산사 삼층전 미륵불을 보는 순간 나는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꿈에 본 그 부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대순진리회에 입도를 하게 되었다.

 

입도를 하긴 했지만 천주교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뿐 수도를 제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태극도 이후 수도를 등한시 했던 생활을 반성하며 아버지의 몫까지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을 한 반면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그저 방면의 참배 때나 얼굴을 비칠 뿐 어떻게든 일꾼으로 키워 보려고 시시 때때로 방문하는 방면선감도 그저 데면데면하게 대하면서 탁명자에 불과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IMF라는 위기가 찾아왔다. 국가적 위기는 가정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나는 포덕소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담당선감께서는 직접 대순진리회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셨는데, 진리를 알아가면서 예전에 가졌던 기독교적 신앙의 의문이 자연스레 풀렸고, 무엇이 참진리이며 상제님께서 이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천지공사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수도를 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아마도 아버지께선 언젠가 내가 상제님의 도문소자가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내가 수도를 하면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어떤 일이 생길 때면 꼭 아버지께서는 꿈에 그 일에 관련된 암시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곤 한다. 지금 같은 첨단과학 시대에 꿈을 믿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꿈의 반복 체험과 경험을 통해서 나는 꿈도 하나의 현실임을 믿고 있다.

 

1999년 7월 도장에 내홍이 생겼을 때도 이미 보름 전에 아버지는 내 꿈속에서 도장을 지키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방면 종사원 생활을 마치고 도장에 수호를 들어 올 때도 아버지는 내 꿈속에서 굽이굽이 산길을 걸어 어느 절에 나를 데려다 주셨는데 지금 산에 수호를 서면서 보게 된 정경이 바로 그곳이다. 산 수호의 초소가 비록 나무판자로 만들어져 허름해 보여도 꿈에 본 초소의 모습은 도장의 건물들에 비해 규모만 작을 뿐 단청이 아주 멋들어진 모습이었다. 신명계에서 본 초소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최근에 복지관 도배공사에 작업지원을 나가게 될 때도 아버지는 긴고랑 계곡물이 뿌연 풀물이 되어 나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우리가 수도를 하면 조상님들도 따라서 같이 수도를 하고 있다는 교화 말씀처럼 내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꿈으로든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말과 모습을 통해서 나와 함께 있다는 암시를 주시곤 한다. 아버지께서는 상제님의 일꾼으로 열심히 살아 갈 내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리라. 내 앞에 주어진 모든 일들을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내는 내 모습을 보여 드려야지. 그래서 상제님께서 마련해 주신 후천 오만 년의 세상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함박웃음을 드리고 싶다. 오늘 따라 유난히 아버지가 보고 싶다.

 

 

<대순회보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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