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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방면 조영철 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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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05 조회2,2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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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감께서는 “저는 많이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도의 진리대로 수도해 왔지만 표현하는 데는 많이 서툽니다.”라고 말문을 여셨다. 그러나 말문을 여시고 나서는 입도와 수도 과정에 대해서 일사천리로 말씀해 주셨는데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감께서는 1934년 생으로 입도는 1965년 (음) 1월 16일에 하셨고 1994년 8월 5일에 선감 임명을 모셨다.

 

  어떤 계기로 입도하시게 되었습니까?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6세부터 9세까지 한문을 배웠고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때라서 학교에 들어가서도 일본글만 배웠습니다. 해방을 맞이할 때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그리고 6·25가 터졌습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많은 피란민들이 마을마다 들어 왔습니다. 이때 열병이 돌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부모님 두 분이 열병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순식간에 70세 넘으신 조모님과 육남매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식구들과 같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조모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19세에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처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처조부께서는 김구(金九), 신익희(申翼熙) 선생 같은 분들과 독립운동을 하다 오셨습니다. 손주 사위인 저에게 『정감록(鄭鑑錄)』에 있는 비결을 들려 주셨습니다. ‘도하지(道下知)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고 하시면서 방공호를 파서 피난해야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처조부 방에 보니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관인(官印)이 찍힌 『백범일지』가 있어서 읽었습니다. 그때 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은 나라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고생하셨는데 나는 농사만 짓다가 죽을 것인가. 나도 누구를 도와서 큰일을 해야 할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대 다녀와서 마을 유지 몇 분들과 상의해서 구판장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서울서 물건을 사와서 구판장을 운영 하게 되었습니다. 3년간 운영하고나니 구판장이 커졌습니다. 그렇게 되니 동네에서 별별 잡음이 다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구판장을 부락에 넘겨주고 손을 떼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농사일이 없는 겨울철에는 마을마다 노름으로 소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도 노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집사람이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안 되니까 고모댁에 인사드리러 가자면서 저를 처가에 데리고 갔습니다. 처고모께서 입도치성을 드리면 노름을 안 하게 된다고 집사람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입도하게 된 계기입니다. 저는 그때만 해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때라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배부르고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집사람도 제게 직접 권하지 못한 거지요.

  처가에서 저녁을 먹고 있으니 10시경에 세 분의 임원이 오셨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양복을 못 입고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모두 양복을 잘 입고 허우대도 좋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제 눈에는 사기꾼처럼 보였습니다. 이 세 분이 장인한테 먼저 도담을 했습니다. 도담을 듣고 나시더니 장인어른이 저보고 “얘 너도 같이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인어른 어려워서 반대를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입도식을 새벽 1시에 했습니다. 절을 하라고 시키면서 손을 번쩍 들어서 절을 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라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른들이 시키니까 했지 제 마음에는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김영진 선감께서 새벽에 잠을 자면 안되고 주문들고 읽어야 된다 하셔서 주문을 들고 읽으면서 날을 샜습니다. 아침에 날이 밝으니까 김영진 선감께서 이제는 기도를 모셔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모시느냐고 물어 봤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모셔야 된다고 하시면서 절하는 방법을 종이에 적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모시고 일하러 나갔습니다. 새벽 1시에 기도를 모시니까 식구들이 일어나서 미쳤다고 했습니다.

 

  포덕 사업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입도식하고 김영진 선감께서 열흘 후에 갈 테니 동네사람들을 모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제가 이야기하면 다 모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도 닦기 전부터 친한 임중균 선감(현재 한성 1방면 선감)이 오더니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입도식 한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문을 보여줬더니 주문 한 장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사람은 안 주고 싶은데 임선감은 주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주었더니 입도식도 하지 않았는데 며칠 안 되어서 나는 반도 못 외었는데 주문을 다 외었어요.

  열흘 후에 그 분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도담도 제대로 못 들어서 태극도인지도 모를 때여서 불교, 기독교, 통일교 할 것 없이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도담을 마치고나니 임선감하고 임선감 5촌 아저씨인 이장하고 둘이 남아서 입도식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밤에 특별히 준비할만한 것도 없어서 가게에 가서 있는 대로 과일이나 북어포 등을 사고 시루떡은 집에서 쌀로 조금이나마 해서 올렸어요.

  이렇게 임선감 입도식을 치르고 나니 이제부터는 포덕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도(道)를 잘 모르던 때였지만 전쟁을 치루고 난 다음이라서 그런지 누구에게든지 가서 ‘궁궁을을(弓弓乙乙) 도하지(道下知)’ 하면서 피난처를 찾아서 부산으로 가야 산다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 소문이 나서 날마다 입도식 해달라고 하는데 손이 모자라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마다 다니면서 포덕을 했는데 9일 밤을 샜던 적도 있습니다.

  이때 선감댁은 남대문시장에 있었는데 선감댁 2층에 포덕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도담을 듣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매일 기도 모시고 포덕 해야 한다는 일심을 가지니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면사무소에 가서 면장이나 부면장이나 면서기 할 것 없이 책상 싹 쓸어버리고 “도 닦아야 살지 이것 해서 사느냐고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해도 말리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지금은 그렇게 하면 바로 경찰서로 잡혀가겠죠.


  포덕 사업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포덕을 하러 다니는데 광주경찰서에서 제가 집에 없는 사이 날 찾으러 왔다고 하더군요. 우리 집에 온 경찰을 만나니 종교 실태 파악하러 나왔다고 둘러대더라구요. 그런데 실상은 경찰들이 나를 빨갱이로 알고 잡으러 온 것입니다. 이장이 저하고 포덕하러 다니다보니 동네일을 보지 못하게 되어서 동네가 엉망이 되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경찰서에다 고발 한 것입니다. 빨갱이 사상이 들어가서 저리 한다고 한 모양입니다. 매일 경찰들이 저를 감시하려고 왔는데 그 경찰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빨갱이면 지금이라도 잡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래도 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 상제님의 덕화라고 생각합니다.

  임선감 집안은 아버지까지 7형제고 사촌들이 40여 명이 됩니다. 그런데 임선감을 도 닦는다고 데리고 다니니까 그 집안에서는 제가 죽일 놈이 된 겁니다. 포덕소에 돌아오니 임선감 집안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갑자기 눈에 불이 번쩍 했습니다. 임선감 삼촌이 술김에 호롱불 받침대를 집어 던진 것에 왼쪽 이마를 맞아서 이마가 푹 들어 가버렸습니다.(지금도 이마 왼쪽이 옴폭하게 들어가 있음.) 머리가 흔들려서 앉아 있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서울 포덕소로 돌아와서 드러누웠습니다.

  임선감이 와서 삼촌하고 싸우면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참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임원들이 매일 임선감 삼촌을 데리고 저한테 왔습니다. 술김에 한 일인데 뭐라 하겠습니까? 임원들이 안 계시면 그 삼촌보고 돌아가시라고 하고 보냈습니다. 병원에도 안 가고 5일 동안 심고만 드리고 나니 머리 흔들거리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다시 일어나 포덕하러 다녔습니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상처가 다 아물었습니다. 『전경』에 “상제께서 까닭 없이 오해를 받고 구설을 사서 분개하는 사람을 가리켜 ‘바람도 불다가 그치나니 남의 시비를 잘 이기라. 동정에 때가 있나니 걷힐 때에는 흔적도 없이 걷히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라는 구절도 있잖습니까. 이만하기가 상제님 덕화라고 생각합니다.

 

  도전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기억이 남으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도전님께서 수리사에서 49일 공부를 마치고 나오시는 날이었습니다. 편안하게 모실 생각으로 택시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도전님께서 “네 마음대로 택시를 불러왔느냐?”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택시를 돌려보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기사보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기사에게 약속한 운임의 반 정도 주고 사정을 설명하여 돌려보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당신이 걸어간다고 말씀하시고 20리 길을 걸어서 내려오셨습니다. 중간 중간 쉬시면서 도담을 해 주셨습니다. 제가 생각해보니 공부를 하시고 난 후 몸을 풀어야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택시를 불렀던 것입니다. 소인들은 자기생각만하니 어찌 대인의 큰 뜻을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도전님께서 “도장에 들어와서 시키지 않는 일은 놀아도 하지 마라. 할 일이 없으면 방에 들어가서 놀아라. 자기 맘대로 하는 건 필요 없다.”고 분부 하셨습니다. 작업자들이 아침 먹고 현장에 나가서 서 있으면 종무원장이 나와서 다른 일을 시킵니다. 나중에 도전님께서 누가 시켜서 하느냐고 물으시면 작업자들이 대답을 못합니다. 그래도 종무원장이 시켜서 한 일 인줄 아십니다. 도전님께서 나한테 이야기는 하고 해야 될 것이 아니냐고 분부 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 되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작업 했던 것을 뜯어내고 다시 작업하곤 했습니다.

  목수들한테 먹줄을 놓아서 벽돌을 쌓아라 하시고 벽돌을 쌓아서 굳어지고 나면 나오셔서 보시고 잘못 쌓았다고 헐어라 하십니다. 작업자들은 돈도 없는데 물자가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왕에 뜯으라고 하시면 시멘트가 굳기 전에 말씀해주시면 다시 사용 할 수 있을텐데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서너 번하고 나면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물자가 문제가 아니고 우리 마음을 보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그 뒤로는 열 번이면 열 번, 스무 번이면 스무 번 뭐라 말씀하셔도 ‘네’라고 대답하고 다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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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전경』을 보면 “상제께서 비천한 사람에게도 반드시 존댓말을 쓰셨도다. 김 형렬은 자기 머슴 지 남식을 대하실 때마다 존댓말을 쓰시는 상제를 대하기에 매우 민망스러워 ‘이 사람은 저의 머슴이오니 말씀을 낮추시옵소서’ 하고 청하니라. 이에 상제께서 ‘그 사람은 그대의 머슴이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나뇨. 이 시골에서는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 말을 고치기 어려울 것이로되 다른 고을에 가서는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다 존경하라. 이후로는 적서의 명분과 반상의 구별이 없느니라’ 일러 주셨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상제님 말씀처럼 도인은 누구나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 임원이라고, 호수(戶數)가 많다고, 임명을 먼저 모셨다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반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 하셨는데 반말로 인해 척이 되는 행동을 하지 말고 서로 존중해서 운수마당까지 우리 함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부족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의 말을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순회보》 80호, 「도인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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