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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두 동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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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28 조회4,0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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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김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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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에는 상제님의 두 명의 동생이 등장한다. 아우 영학과 누이 선돌부인이다. 각별하다고 할 수 있는 동생들과 천지공사를 행하신 상제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상제님의 마음은 어떠하셨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우 영학은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갑오년(1894)과 정유년(1897) 두 차례 글방을 차리셨을 때이다. 상제님의 교육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을 정도로 뛰어났다.(행록 1장 20절, 2장 1절) 그러나 아우는 공부보다는 도술 배우기를 원했다. 상제님께서 『대학』을 읽으라고 권유하셨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술서를 공부하는 데 몰두하였다.(권지 1장 29절) 상제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이다. 한번은 도술에 통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셨다.(권지 1장 15절) 정남기와 김영서가 일본말 또는 배우를 실제로 해보고 그것의 헛됨을 깨달았듯이, (교법 2장 29절) 아우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아우의 마음이 바뀌지 않자, 죽음을 경고하는 시 한 구절을 보내 잘못을 깨닫도록 하신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결국 아우는 죽게 된다. 자초했다고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아우를 위해 부모에게 유언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다. 갑진년(1904) 2월쯤의 일이다.(권지 1장 28절, 29절)
  누이 선돌부인은 고부군(현재 정읍시 고부면) 입석리의 박창국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입석[立: 서다, 石: 돌]은 우리말로 ‘선돌’이기 때문에 입석리는 ‘선돌마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향에선 그곳으로 시집간 누이를 ‘선돌부인’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마을 이름이 그렇게 된 것은 마을 동편의 논 옆에 어른 키높이의 기다란 돌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을사년(1905) 7월 상제님은 시집간 누이를 찾아 입석리에 가셨다. 마침 맨발로 풀밭을 다니는 누이를 보게 된다. 누이는 신이 없을 정도로 헐벗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01 아우 영학이 죽은 지 일년 반이 되는 때이다. 하나뿐인 동생이 지난(至難)한 시집살이를 하는 것을 본 상제님은 마음이 어떠셨을까? 바로 이어지는 행동에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풀밭 속에서 몸을 감추고 있는 독사를 감지하고, 이것이 맨발의 누이를 물까 걱정하여 휘파람을 불어 뜰 아래로 나오게 하신다. 늘상 맨발인 누이는 언제든지 독사의 표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남편 창국이 집에 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하신 것처럼 마침 그가 들어와 상장(喪杖)으로 독사를 죽인다. 누이에 대한 상제님의 마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누이가 땅에 묻어있는 독사의 피를 맨발로 밟을까 염려하여 친히 그것을 밟아 독기를 제거하신다.(행록 3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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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천하시기 전, 상제님께서는 누이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기셨다.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아오면 봉서(封書)를 전해주라는 것이다. 누이는 상제님께서 화천(化天)하신 지 10년 지난 기미년(1919)에 봉서를 도주님께 전해주어 임무를 완수하였다. 유품(遺品)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상제님의 당부를 마음속에 새겨 그 긴 시간을 견뎌낸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계시(1917)와 함께 이 봉서로써 종통을 세우시게 되는데,02 누이가 봉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정읍 마동(현 정읍시 북면 화해리 조동마을)에 있는 김기부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무슨 연고에서인지 누이는 입석리에서 김기부의 집으로 옮겨 어머니 권씨 부인, 조카 순임과 함께 살고 있었다.(교운 2장 13절)
  누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상제님께서 동곡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가 천지도수(天地度數)의 조화둔궤이므로 찾아야 한다고 도주님께 조언한 것이다.(교운 2장 14절) 누이는 하늘로부터 명(命)을 받아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이 역시 상제님에 대한 변치 않는 진실된 마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도주님은 그해(1919) 9월 4일 새벽 정읍 대흥리 보천교 본부에 가서 둔궤를 찾아오신다.(교운 2장 17절)
  아우 영학과 누이 선돌부인, 상제님에게는 똑같이 소중한 동생들이다. 하지만 영학은 상제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선돌부인은 새겨듣고 지켜냈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 결과, 영학과 달리 선돌부인은 상제님의 대업(大業)이 이루어지는 데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우니라.”(교법 2장 6절) 하셨다. 수도인들도 죽기보다 어려운, 마음 지키기를 통해 상제님의 유지(遺志)를 받들 수 있는 것이다.  

 <대순회보> 179호

 

<참고문헌>
『전경』
『대순지침』
한글학회 편, 『한국 지명 총람 12(전북편ㆍ하)』, 서울: 한글학회, 1988.
임남곤 편저, 『정읍문화재지』, 전북 정읍: 정읍문화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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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듯이, 상제님께서는 맨발의 누이를 염려하여 땅에 있는 독사의 피를 밟아 독기를 제거하신다. 누이에게 신이 있었다면 신을 벗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데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02 『대순지침』,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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