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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中華)의 본고장, 섬서성을 둘러보고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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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선근 작성일2019.03.05 조회1,6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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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부 차장 차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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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과 병마용이 있는 섬서성 서안의 임동

 

  진(秦)나라01의 진시황은 주나라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군주이다. 그는 도량형과 문자·화폐를 통일시키고, 봉건제를 폐지하여 중앙의 관리가 직접 지방으로 가서 통치하는 군현제를 실시하는 등 명실 공히 ‘통일 중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10년간 자신의 능을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를 벌였는데, 작업 인원수가 많을 때는 무려 7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기원전 210년 7월 진시황이 죽자, 그해 9월 시신을 함양에서 옮겨와 장례를 지낸 후 여산의 능에 묻었다.(九月葬始皇於驪山下: 구월에 진시황을 여산 아래에 장례 지냈다, 권지 1장 10절)

  그의 능은 섬서성 서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 떨어진 임동(臨潼) 여산(驪山) 북쪽 기슭에 위치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진시황릉의 규모는 대단히 웅장하여 능이 아니라 산으로 보인다. 현재는 높이가 79m이지만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봉분의 높이가 50여 장(丈) 즉 약 115m에 달했다고 한다.

  진시황릉 앞에는 그의 생전 업적을 묘사한 각종 조형물들이 장식되어 있고, 옆에는 작은 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능의 봉분 가운데로 일직선의 긴 계단을 마련해 놓아서 정상까지 걸어가 볼 수도 있다. 봉분 위로 길을 내 놓은 무덤은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시황릉을 방문하게 되면 이 능위를 한번 올라갈 필요가 있다.

  진시황릉은 잔디가 아닌 석류나무로 덮여있어 처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만, 진시황릉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어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이르기를 능위에 봉토를 다 덮은 후 ‘풀과 나무를 심어라’ 하였으니, 원래 봉토에 수목을 심었음을 설명한다.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천자의 능에는 소나무를 심고, 제후의 무덤에는 측백나무를, 대부의 그것에는 약초를 심었다고 하며, 대개 관직과 작위가 높으면 심는 수목도 더 많았다. 시황제릉에는 당연히 전체적으로 소나무와 측백나무, 약초가 심어져 있으니 이것은 그 비할 데 없는 높은 지위에 걸맞을 뿐 아니라, 전설상의 동물인 ‘위(媦)’가 지하를 뚫고 들어가 사자(死者)의 뇌수를 손상시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능위에 있던 나무들은 훼손되어 사라졌으나, 우리는 현재 봉토에 푸르른 석류나무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은 섬서성 문화국에서 특별비용을 들여 심은 것이다. 

 

 아름답게 꾸민 정원을 지나 계단을 올라 진시황릉을 발아래에 밟고 서면,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모두 들어온다. 그러나 이런 풍경보다는, 발굴되지 않은 채 아직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능을 밟고 서 있다는 사실로 인해 약간은 들뜬 기분이 들게 된다.

  진시황릉은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실상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릉의 내부에는 경사진 묘도(墓道)가 있고, 묘의 천정에는 천문성상도(天文星象圖)가 그려져 있으며, 묘 아래에는 수은으로 된 하천과 호수가 있고, 인어의 기름으로 만든 초가 진시황의 영생을 밝히며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시설물들은 당시의 기술로 설치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여겨져 왔으나, 2003년 리모콘으로 조종하는 소형 로봇을 능 안으로 들여보내 촬영해 본 결과 대부분의 모습이 기록과 일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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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시황릉 정상에 오르는 계단

2 진시황릉에 심어져 있는 석류나무

3 진시황릉의 모습. 뒤에 보이는 산 전체가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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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병마용 출토 당시의 모습. 원래의 용(俑)들이 채색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병마용 내부의 모습

6 병마용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용의 모습

 

   아직까지 도굴된 바가 없다고 하는 진시황릉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발굴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발굴기술과 유적보호기술이 부족하여 자칫하면 능 전체가 크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곳에는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 무덤이 있다. 고대에는 군주가 죽으면 그 신하나 종을 모두 산채로 같이 매장하는 순장(殉葬)제도가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산 사람대신 그 사람의 형상을 모방한 ‘용(俑)’을 만들어 매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대량의 병마용을 부장품으로 사용한 경우는 진시황릉이 최초라고 한다. 1974년 3월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진시황 병마용 무덤은 모두 3개가 있고, 1호 무덤에는 대략 총 6,000여 개의 도용(陶俑)과 도마(陶馬)가, 2호 무덤에는 1,400여 개, 3호 무덤에는 전차 1대와 68개의 위병용(衛兵俑)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크기가 대략 175㎝ 정도에 당시 살았던 산 사람들의 대용품이었던 이 ‘용(俑)’들은 그 형상이 당시 인물들의 실제 모습을 재현했던 것이어서 얼굴 모양이나 표정이 서로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병마용의 도용(陶俑)과 도마(陶馬)는 각 부위를 나누어서 진흙으로 따로따로 제작한 다음, 하나로 붙인 후 불에 구워서 채색한 것이다. 아쉽게도 2,0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데다 발굴 직후 환경의 급변으로 인하여 불과 며칠 만에 탈색이 되어 버려 지금은 고유의 색을 확인할 수가 없다.

  용(俑)들이 차고 있는 칼에는 크롬이 한 겹 도금되어 있는데, 크롬을 도금하기 위해서는 전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기술은 1937년에야 발견되었다고 하니, 2,000년 전 진나라 기술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칼에 도금을 한 것인지 불가사의할 뿐이다. 또한 용(俑)에 채색된 염료는 모두 천연광물질로서 특히 자색(紫色)의 성분은 규산 동 바륨으로, 이것은 자연계에 없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인공합성을 통해 만들 수 있었다고 하니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병마용 무덤은 문헌은 물론 구전으로도 그 존재 사실이 전해지는 바가 전혀 없어, 이 무덤의 발견은 더더욱 신비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진시황릉을 호위하기 위해 만들어진 병마용 무덤은 우습게도 진시황릉에 비해 입장료가 거의 2배 이상 비싸다.(진시황릉은 40元, 병마용은 90元) 관광객들도 능 하나만 덩그렇게 있는 진시황릉보다는 볼거리가 비교적 풍부한 병마용 무덤을 더 많이 찾는 편이다. 그래서 진시황릉 입구에는 병마용에 가기 전에 반드시 진시황릉부터 들러주기를 부탁하는 간판까지 내 걸어놓았을 정도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진시황제. 그의 거대한 능과 그를 호위하는 병마용 무덤을 보면 찬란한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마음보다는 먼저 이것을 건설하기 위해 강제로 동원되어 땀 흘려야 했던, 때로는 다치거나 목숨도 잃어야 했던 민초들의 가련한 처지가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제갈량의 무덤이 있는 섬서성 한중시 면현 

 

  성인들치고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소설에는 유비, 조조를 필두로 관우, 장비, 조운 등등 수많은 군웅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인물로 묘사되는 이는 단연 제갈량이다.

  제갈량[諸葛亮, 자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 혹은 무후(武侯), 181~234]은 실존 인물로, 후한(後漢)이 몰락한 후 유비를 도와 촉한(蜀漢)을 세웠으며 유비의 아들 유선을 보좌하여 승상으로 나라를 책임졌던 위대한 인물이다. 제갈량은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를 토벌하고 한실(漢室)을 부흥하기 위하여 촉한의 황제 유선에게 출사표(出師表)를 바치고 모두 5차에 걸쳐 출정을 한다. 그러나 촉한과 위나라의 국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02 결국 234년 다섯 번째의 출병때 제갈량은 섬서성 미현(縣) 남서쪽 구릉지대인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바둑에서 한수만 높으면 이기나니라. 남이 모르는 공부를 깊이 많이 하여두라. 이제 비록 장량(張良)·제갈(諸葛)이 쏟아져 나올지라도 어느 틈에 끼어 있었는지 모르리라.”(공사 1장 36절), “공명지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종용(子房之從容)을 본받으라.”(교법 3장 29절)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을 보면, 상제님께서도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셨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섬서성을 방문하게 되면, 어느 정도 과장은 되었겠지만 그래도 신화적인 삶을 살았던 영웅 제갈량의 무덤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제갈량이 잠들어 있는 곳은 섬서성 한중시(漢中市) 면현(勉縣)이다. 한중(漢中)은 비옥한 평야가 많은 분지(盆地)로서 촉한(蜀漢)의 수도인 성도(成都)에서 동북으로 약 380㎞ 떨어진 곳, 즉 촉한에서 위나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있다. 제갈량은 다섯 차례에 걸쳐 위나라를 정벌하는 동안 이곳 한중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 등 군수물자를 조달하였으니, 실로 한중은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제갈량의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던 곳이다.

  섬서성 성도인 서안에서 한중 면현으로 간다면, 자오도(子午道)라고 불리는 산길을 따라 서남쪽으로 약 300㎞ 정도를 달려야 한다. 이 길은 해발 1,500~2,000m 사이의 험준한 산악의 절벽을 타고 꼬불꼬불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자동차로 간다고 해도 7~8시간이나 걸리고 몹시 고달프다. 2007년 가을이 되면 한중-서안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3~4시간 정도면 편안하게 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험준한 자오도를 따라 가 보며 옛날 제갈량의 전략을 떠올려보는 것이 훨씬 더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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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량의 무덤이 있는 섬서성 한중시 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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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제갈량은 자오도(子午道)를 잘만 활용했어도 한실부흥이라는 그의 꿈을 실현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제갈량이 거점으로 삼았던 한중에서 위나라로 진격해 들어가는 길은 대략 진창도(陳倉道), 포사도(褒斜道), 당락도(駱道), 자오도 네 가지가 있었다. 이중 동쪽의 자오도가 서안으로 진격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지만, 너무 험준하여 군수물자 행렬까지 딸린 일단의 대군이 넘어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228년 제갈량의 1차 위나라 북벌 때 촉한의 장수 위연(魏延)은 바로 이 자오도로 진군해 위나라를 급습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비교적 평탄한 길인 진창도로 진격했고, 마속의 가정전투 패배로 1차 정벌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훗날의 2차부터 5차까지 네 차례의 정벌도 진창도나 포사도를 이용했을 뿐, 결코 험한 산길, 자오도를 이용한 기습전은 구사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제갈량이 촉한과 위나라의 전력 차이를 극복하고자 ‘이공위수(以攻爲守: 공격을 함으로써 방어를 하는 것)’ 전략을 사용하여 ‘패배하지 않는 전쟁’을 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03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제갈량의 안전을 전제로 한 공격은 매우 아쉬움이 남는다. 카르타고의 한니발(기원전 247~183)이나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高仙芝, ?~755) 장군처럼, 제갈량도 위연의 건의대로 이 험한 자오도를 따라 진군했다면 오늘날의 역사는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끝내 ‘한실부흥’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의 시신은 남쪽으로 약 180㎞ 떨어진 한중으로 이송되어 그의 유언에 따라 면현 남쪽 정군산(定軍山) 옆의 한 소박한 시골마을에 묻혔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제갈량의 유언이 “정군산에 묻되 담을 치지 말고, 석물을 쓰지 말며, 모든 제물도 없이 하라.”고 되어 있고, 정사(正史) 『삼국지』에는 “정군산에 묻되 산에 의지하여 묘지를 만들고, 묘지는 관을 넣을 수 있도록만 하며, 염할 때는 평상시 입던 옷으로 하고, 제사용품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라.”고 되어 있다. 그의 유언이 지켜졌음인지, 제갈량의 무덤은 결코 화려하지 않고 꽤 소박하게 느껴진다. 그의 무덤 옆쪽에는 황과수(黃果樹)라는 이름의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이것은 제갈량의 아내인 황씨(黃氏) 부인이 살았을 때 못다 한 부부의 정이 그리워, 죽어서 남편의 무덤 옆에 나무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한다. 무덤의 주변은 현대적이지 않고 중국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으며, 깨끗하면서도 차분하고 은은하게 단장되어 있어, 산책을 하면서 제갈량의 기품을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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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후묘 편액

2 제갈량묘(무후묘) 입구

3 무후묘에 있는 제갈량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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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면에서 본 무후묘

5 측면에서 본 무후묘. 무덤에 난 나무는 제갈량 부인의 혼이 환생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6 무후사 입구

7 무후사의 배치도

 

 


  무후묘에서 북쪽으로 약 5.5㎞ 떨어진 곳에는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인 무후사(武侯司)가 있다. 이 무후사는 중국 전역에 있는 무후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촉한 성도의 무후사보다도 41년 앞서 세워진 것이다. 이 사당도 약간 작기는 하지만 무후묘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 꼭 한번 들러볼 만하다.

 

  섬서성 한 지역을 답사한다고는 하지만 워낙 땅이 넓은 관계로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둘러본다는 것은 무리였다. 섬서성은 『전경』에 등장하는 중국 관련 인물들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이기 때문에, 혹 여유가 있다면 도인들이 한번 들러봄직한 곳이었다. 이번 답사는 장마 기간이어서 내내 비를 맞아야 했고, 특히 사전 정보의 부족으로 많은 아까운 시간을 길에서 허비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가보지 못한 곳도 많은데, 특히 주문왕과 강태공이 만났다는 반계의 조어대, 제갈량이 숨을 거둔 오장원, 장량의 사당, 주문왕의 유적이 있는 기산 일대와 주나라 문왕의 능, 장릉(유방의 능), 소릉(당태종의 능, 그 주위에는 24장의 일부 묘가 있다고 한다), 항우와 유방의 홍문지회(鴻門之會)가 있었던 홍문(鴻門), 노자가 『도덕경』을 저술하고 강론했다는 도교의 성지, 누관대(樓觀臺)를 방문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웠다.

  사실 수도를 하면서 견문(見聞)을 넓힌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틈틈이 짬을 내어 견문을 넓히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견문을 넓히는 목적이 단순히 지식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고 듣고 생각하는 능력을 배양하여 안목(眼目)을 넓히고자 함에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답사는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인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가졌던 생각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답사를 통해 우리는 책만의 지식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체득함으로써 내일 우리가 결정하고 나아가야 할 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우리가 ‘실력(實力)’을 기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01 영어로 중국을 ‘차이나(China)’라고 부르게 된 이유도, 진나라가 실크로드를 통해 서방에 알려질 때 ‘진(秦)’ 발음 ‘친[chi’n]’이 전와(轉訛)하여 ‘치나(Cina)’로 전해졌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02 당시 삼국의 국력을 비교해 보면 위·오·촉의 주수(州數)는 9:3:1, 호수(戶數)는 7:5:3, 구수(口數)는 4:2:1의 비율로 오·촉은 광대한 지역임에 비하여 호구의 파악이나 주군의 편재가 위보다 뒤졌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삼국의 실력은 6:2:1 정도로 추정되어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위가 가장 세력이 강성했음을 알 수 있다.(이근명 편역, 『중국역사[상권]』, 도서출판 신서원, 2002, pp.268~269)

03 야마구치 히사카즈 지음, 전종훈 옮김,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 이학사, 2000, p.88~10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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