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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문명의 조화가 있는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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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영기 작성일2019.08.01 조회1,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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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홍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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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를 뒤로 하고 대순해외봉사단은 일정의 마지막 종교답사지인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로 향했다. 이집트에서의 빡빡한 일정과 더운 날씨는 우리들의 심신을 지치게 만들었지만, 이스탄불을 향한 4시간의 비행은 우리에게 푸른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그 찰나의 여유는 지친 심신을 회복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인류문명의 박물관 이스탄불 

 

  2009년 8월 5일 지중해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입구에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현지 가이드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를 따라 첫 답사지인 성 소피아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 소피아 성당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는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면, 터키인들은 한국인에게 상당히 우호적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고구려와 돌궐[지금의 터키]은 오랜 세월을 동맹을 맺어 형제의 나라로 가깝게 지냈으며, 현재 터키의 고등학교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 전쟁 때도 이러한 이유로 많은 터키군이 참전하여 도와주었으며, 전쟁 후에도 터키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우리나라 재건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터키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인연의 끈은 2002년 월드컵까지 이어져 한국인과 터키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가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경기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 중 유독 터키인들은 그들의 국기(國旗)와 관련된 일화를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가 일러준 그 일화의 내용은 2002년 월드컵 때 한국과 터키와의 시합에 앞서 먼저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연주되고, 이어서 터키 국가(國歌)가 연주될 때 대한민국응원단 붉은악마가 대형 터키 국기를 펼쳤고 이 일은 터키인에게는 아주 큰 감동이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터키 수상은 붉은 악마에게 터키 국기의 기증을 부탁했고, 붉은악마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터키에 그 국기를 기증했다. 그 국기는 현재 터키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게다가 이 일이 있은 후 6개월간 터키에 있는 식당에서는 한국인이면 공짜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들이 느낀 그날의 감동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값진 선물이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잠깐의 유용한 정보와 정겨운 일화를 뒤로 하고 가이드는 본격적으로 이스탄불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스탄불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인 유럽과 거주지역인 아시아지역이 한 나라의 수도에 속해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도시이다. 게다가 이스탄불은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잇고, 유럽과 아시아를 양분하는 보스포러스 해협 양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곳은 지정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이스탄불은 여러 제국의 수도였다. 과거 비잔틴 제국시절에는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로 불리었고,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이스탄불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스탄불은 면적 7,500㎢ 인구 1,500만 명을 가진 대도시로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곳을 “인류 문명이 살아 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 불렀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히타이트, 아시리아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문화, 초기 기독교 문화, 비잔틴 문화, 그리고 이슬람 문화의 진수들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는 한 점에서 서로 만나고 있었다. 이스탄불에는 인류가 이룩한 5천 년 역사의 문화유산들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성 소피아 성당으로 가는 길에 가이드로가 들려준 이스탄불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적 이야기를 들은 나로 하여금 인류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이곳에서의 첫 인상은 편안함과 새로움, 그리고 정겨움이었다. 햇볕과 바람은 내 고향 동해 바다와 비슷해서 편안했고, 건물들의 색감과 모양이 유럽풍의 이미지라 새로웠으며, 터키인에 대해서는 정겨움을 느꼈다.

 


비잔틴 최대의 걸작, 성 소피아 성당(아야 소피아 박물관)


  우리 일행이 탑승한 버스는 어느덧 주택가의 좁을 길을 지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광장입구에 도착했다. 그 광장을 중심으로 우뚝 솟은 건물들과 이국적인 야외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고,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북적였다. 그 복잡한 건물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게 우뚝 솟은 네 개의 첨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누구나 그 규모와 건축양식에 감탄한다는 성 소피아 성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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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건축을 대표하는 최대 건축물이자, 비잔틴 건축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건축물로 손꼽힌다. 이 건축물은 5세기에 건축되어 천 년 동안 세계 최대의 크기를 과시하던 성당이었다. 성당에는 네 개의 첨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 네 개의 첨탑은 성당이 이슬람 사원이 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건물은 특이하게도 916년간은 성당, 481년간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고, 1934년에 박물관으로 지정된 이후 공식적으로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건물은 도시 속에서 보는 ‘문명의 스펙터클’로, 기독교는 물론 이슬람 세계로부터도 이목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밖에도 성 소피아 성당은 매우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1,200년간의 비잔틴 문화와 500년간의 이슬람 문화가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인데, 이는 곧 이스탄불의 역사를 보여 주는 듯 했다. 터키에서의 첫째 날 마지막 일정이기도 했던 성 소피아 성당 관람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향하면서 나의 눈에 비친 터키의 주변 경관은 마치 한국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리와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의 형태는 마치 내가 서울의 동호대교를 건너 옥수동 쪽으로 가는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낯선 이국땅임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은 왠지 낯익은 듯 고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오스만 황제의 궁전, 톱카프 사라이


  이스탄불에서의 두 번 째날, 일행은 톱카프 궁전으로 향했다. 톱카프 궁전은 19세기 마흐무드 2세 황제(1808~1839) 때까지 약 380여 년간 이어져 온 오스만 제국 황제의 궁전으로 오스만 제국의 국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최고기관이었다. 처음에는 ‘예니 사라이’라고 불렸으나,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된 데 연유하여 톱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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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황제를 뜻하는 터키어]들이 거주하며, 재상 회의가 열리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규모도 굉장하여 총 면적이 70만 평이나 되며, 벽 길이만도 해도 무려 5㎞나 된다. 이밖에도 이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 특색이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 관심 갖고 볼 것이 많고, 특히 자기, 무기, 직물, 보석, 성물 등 볼거리가 많은 궁전 중의 한 곳이기도 하다. 


  톱카프 궁전은 전체적인 건축양식과 규모, 그리고 장구한 역사로도 유명하지만, 세인들에게는 보석관의 전시품들도 빼 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이기도 하다. 이 보석관을 대표하는 물건을 두 개만 꼽는다면 단연 톱카프 단검과 다이아몬드를 꼽을 수 있다. 먼저 길이 35㎝의 단검은 에머랄드로 장식되어 있는데, 정말 화려하고 멋스럽다. 그리고 또 다른 전시관의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는 이곳을 찾는 세계 여성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보고 있으려니 속으로는 절로 세상에 저런 것도 있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 보석관에서 단검과 다이아몬드를 보고 가격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할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쯤 가이드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때 모인 이 보석들을 모두 내다팔면 터키국민이 약 50년간 먹고 살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정말이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보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터키인들이 보석의 가치과 아름다움보다 그들이 이를 역사적 문화유산으로 잘 승화시켜 더욱 더 값진 보배로 이어가길 바란다. 

 


오스만 황제의 야심작, 술탄 아흐메드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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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탄 아흐메드 사원은 아흐메드 1세 황제(1603~1617년) 때 지은 오스만 제국 황제의 야심작이다. 1616년에 건립된 술탄 아흐메드 사원은 전통적인 오스만 건축 양식으로 지은 것인데, 건축미(建築美)에 있어서는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원은 일반인에게도 개방이 되어 사원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지라는 이유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과 전 세계에서 찾아온 다양한 인종들의 시큼한 발 냄새는 참아야 했다.


  한편 사원 내, 외부에 돔 양식으로 지어진 여섯 개의 첨탑과 크고 작은 돔의 균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게다가 사원 내부는 약 2만 1,000개에 달하는 파란색의 이즈닉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때문에 ‘파란색의 타일이 많은 사원이라는 뜻으로 이 사원을 ‘블루 모스크’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일행은 블루모스크를 관람한 뒤 비잔틴 제국이 적의 포위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지하저수지와 영화 ‘벤허’에서 본 것과 같은 이륜마차(二輪馬車) 경기장이었던 히포드럼 광장을 관람하고 조금은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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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을 마치며

 

  아프리카 해외봉사와 종교답사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버스를 타고 숙소에서 한 시간 거리의 코라 교회[카리예 박물관]로 갔다. 차창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코라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코라’에 있던 구세주 교회였다. ‘코라’는 중세 그리스어로 ‘교외’ ‘시골’이라는 뜻으로 이 교회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성 밖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교회는 성 소피아 성당만큼 건물 자체가 크지는 않지만, 성당 안에 있는 현란한 모자이크와 화려한 프레스코화 때문에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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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를 관람한 뒤 우리 일행은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관람 장소인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향했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가득찬 정원’이란 뜻의 돌마바흐체 궁전은 해변을 흙으로 메우고 세운 곳이라고 한다. 50만 금화, 즉 현재 돈 5억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된 이 궁은 1856년 완공되었는데, 궁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3층의 대칭구조로 지어진 궁의 내부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4톤과 2톤 중량의 샹들리에를 포함한 36개의 샹들리에, 560점 이상의 그림, 손으로 직접 짠 대형 카페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이를 만회하고자 서구화를 추진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하던 압둘메지드 1세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이 왕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결국 막대한 건축비 지출은 어려웠던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지막 관람 장소였던 돌바마흐체 궁전까지 관람을 마치고 나니 머릿속으로 이스탄불이 그려진다. 이스탄불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나는 이곳을 화려하고 웅장함, 그리고 다양함이 있는 곳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 밖에도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문화의 절묘한 어울림 때문인지 화려한 문화 속에서도 터키인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돌바마흐체 궁전을 마지막으로 우리 일행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되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해질 무렵 우리는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해외봉사 및 종교 답사를 통해서 이집트와 터키에서는 화려한 문화와 종교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서는 낙후된 환경으로 인해 굶주림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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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을 마치고 지금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해외봉사 때 만났던 에티오피아 어린이들의 모습은 가슴에서 지워지질 않고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눈빛에 서린 그 절박함과 간절함 … 배고픔의 고통을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배고픔의 고통 속에서도 그 아이들의 눈망울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가슴이 저민다.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종종 눈물이 흐르곤 한다. 우리나라도 배고프고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아프리카에서 배고픔에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상제님의 덕화가 펼쳐지기를 간절히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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