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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팔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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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10 조회3,0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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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께서는 신축년(1901년) 5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가셔서 사십구일 동안 불음불식의 공부를 하시었다. 이 공부는 도주님께서 밝혀 주셨듯이 천지신명을 심판하신 것이었다. 7월 5일에 공부를 마치시고 밖으로 나오시니 그 입으신 옷이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남루한지라 주지승 박금곡이 곧 상제님의 본댁에 사람을 보내 의복을 가져오게 하였더니 부인 정씨가 의복을 내어 놓으며 불경한 말을 하였다. 이것은 평소에 상제님께서 가사를 돌보시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소치였다. 상제님께선『이 옷을 속히 버리라.』하시며 입지 않으셨다. 금곡이 다시 사람을 시켜 부인에게 전하니 그제야 비로소 부인 정씨가 뉘우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시 새 옷을 올리었다. 그 후 상제님께서는『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였으되 제갈량(諸葛亮)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교법2장52절)라고 말씀하시었다.
  제갈량(181~234)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재상으로 뛰어난 지략과 충의로써 중국 역사상 공자, 관운장과 더불어 만인으로부터 추앙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유비(劉備)가 그를 군사(軍師)로 초빙하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 갔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는 유비의 신하가 된 후 오나라의 손 권과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적벽의 싸움에서 대파하는 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유비가 죽은 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후주 유선(劉嬋)을 보필하고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를 꾀하는 한편 운남으로 진출하여 국력을 신장시킨 후 다시 삼국통일의 대업을 도모하였으나 위나라와의 국력차이는 어쩔 수 없어 사마중달(司馬仲達)과 오장원의 전투 중에 병사(病死)하였다.
  그런데 제갈량은 최후의 전투를 하기 위해 오장원으로 출진할 때 이미 자신의 천수가 다했음을 알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하여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하는 자기의 정성이 하늘에 사무쳐 상제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수명도 연장되고 대업도 완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제갈량은 장막 안을 정결히 하고 제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만약 칠일간 주등(主燈)이 꺼지지 않는다면 그의 기도를 하늘이 받아들인 것이고 그의 수명은 열두 해가 연장될 것이다. 제갈량의 부하 장수인 강 유는 사십구 명의 장수들과 함께 장막 밖에서 제갈량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고 같이 정성을 드렸다. 이렇게 지극정성을 드린지 육 일이 지났다. 이제 하루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 밤 갑자기 진문 밖에서 함성이 일어나고 한 장수가 급히 위나라 군사의 침입을 알리려 장막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러다 그만 제단을 건드려 제구와 제물이 쓰러지고 주등이 꺼지고 말았다. 불행히도 제갈량의 기도를 하늘이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제갈량이 가족에게 뽕나무 800그루와 황무지 15경을 남겨둔 것은 자기가 죽은 후에 나라에서 가족에게 큰 보상을 내릴 것을 사양하기 위한 청렴결백한 성품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천하사를 위한 지극한 일심(一心)에는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한낱 중원천하를 회복하고자 하는 일이 이럴진대 삼계를 뜯어 고치는 천지공사에 있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순회보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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