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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허풍(五龍噓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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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10 조회3,0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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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년(1897년)에 상제께서는 금구군 초처면 내주동에 있는 처남 정남기의 집에 글방을 열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글방을 열었다가 그만 두신 지 3년만이었다. 아우 영학과 김형렬의 아들 찬문, 그리고 이웃 서동들이 상제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때에 상제께서는 광구천하의 도움이 되리라 여기고 유불선 음양참위(儒佛仙陰陽讖緯)를 통독하신 후 인심과 속정을 살피고자 주유의 길을 떠나셨다.
  삼년 동안 팔도의 유력을 마치고 경자년(1900년)에 고향인 객망리에 돌아오시어 시루산 상봉에서 머리를 푸시고 공부를 하셨는데, 이 때 상제께서는 호둔을 하시어 동리 나무꾼들을 놀라게 하신 일도 있으며 진법주(眞法呪)를 외우시고 오방신장, 사십팔장과 이십팔장 공사도 보시었다.
  그 후 신축년(1901년), 드디어 상제께서는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가시어 오월 중순부터 칠월 오일까지 사십구일간의 불음불식의 공부를 하시고 천지대도를 열으신 것이다. 대원사는 삼국시대 열반종의 개산조인 보덕의 제자인 일승·심정·대원 등이 창건한 사찰로 조선 중기 때의 인물인 진묵대사와 많은 인연이 있는 절로 유명하다. 진묵대사가 축생들을 천상으로 천도하기 위해 목각사자상을 만든 뒤에 그 위에 북을 올려 놓고 쳤다고 하며, 승방 안에는 진묵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어 대원사와 진묵대사와의 관계를 증명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박금곡이 주지를 맡고 있었던 바, 상제께선 박금곡에게 조용한 방 한 칸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한 채로 공부를 계속하셨다. 이 공부는 도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천지신명을 심판하신 것이었으며 비겁에 쌓인 신명과 재겁에 빠진 창생을 건져 새로운 후천선경을 건설하는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열으시는 공부였다.
  상제께서 공부하신 지 사십구일이 되는 날은 음력으로 칠월에서 다섯 번째 되는 날이고 일진도 무진일로서 무(戊)는 또한 천간에 다섯 번째요, 진(辰)은 용을 뜻하는 그런 날이었다. 그러한 날에 맞추기라도 하듯이 동·서·남·북 사방과 하늘 위에서 각기 다섯 마리의 용이 바람을 거칠게 불어대는 것처럼 일진 광풍이 크게 일더니 드디어 상제께서 공부를 마치시고 금곡을 불러 미음 한 그릇을 청하시었다.
  이로써 진멸지경에 처했던 신명과 창생은 구제되고, 상극과 지배되어 원한이 쌓이고 맺혀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 참혹하게 변한 선천의 세상은 개벽 되어 상극이 없는 도화낙원(道化樂園)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후천개벽의 놀라운 소식은 인간에게보다 미천한 금수들에게 먼저 전해진 것 같다. 상제께서 대원사에서의 공부를 마치신 후, 옷을 갈아 입고 방에서 나오시니 대원사 골자기에 각색의 새와 각종의 짐승이 갑자기 모여들어 반기면서 무언가 애원하는 듯 하였다.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너희 무리들도 후천 해원을 구하려 함인가」하시니 금수들이 알아들은 듯이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상제께서「알았으니 물러 들 가 있거라」고 타이르시니 수많은 금수들이 그제서야 그 분부를 좇는 것이었다.
  여러분! 하찮은 금수들도 상제께서 구제창생하고자 하신 뜻을 알고 후천해원을 구하고자 하였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 태어나서 상제님의 천지공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순회보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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