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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심正心과 방심放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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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12.10 조회20,3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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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께서 공사를 행하실 때나 어느 곳을 정하고 머무실 때에 반드시 종도들에게 정심할 것을 이르셨도다. 방심하는 자에게 마음을 꿰뚫어 보신 듯이 일깨우고 때로는 상제께서 주무시는 틈을 타서 방심하는 자에게 마음을 통찰하신 듯이 깨우쳐 주고 방심을 거두게 하시니라.

(권지 2장 22절)

 

 

위 성구는 상제님께서 계실 때는 종도들이 항상 정심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신 내용이다. 무신(1908)년 여름 어느 날, 차경석이 상제님을 모셨을 때, 종도들이 악사를 불러 가야금을 타게 하고 놀고 있었다. 상제님께서 이를 말리시면서 “내가 있는 곳에서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헛된 일을 못하느니라. 저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늘에 구름 같은 기운이 종도들이 놀고 있는 모양으로 떠 있었다.01 상제님께서 계신 상황이 공적(公的)인 일을 수행하는 시간이면서도 그때의 일이 천지 도수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상제님께서는 공사(公事)에 참여하는 종도들에게 항상 정심을 명하셨던 것이다.

한편, 이렇게 정심해야 하지만,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으로 인해 정심을 놓아 버릴 때의 마음이 바로 방심이다. 이러한 방심에 관한 사례는 최덕겸이 상제님께서 명하신 분부를 잘 따르고 있다가 김덕찬의 말에 의해 자신의 판단으로 처리해버린다는 공사 3장 12절의 내용에서 잘 나타나 있다.

 

 

상제께서 남쪽을 향하여 누우시며 덕겸에게 “내 몸에 파리가 앉지 못하게 잘 날리라”고 이르시고 잠에 드셨도다. 반 시간쯤 지나서 덕찬이 점심을 먹자고 부르기에 그는 상제의 분부가 있음을 알리고 가지 아니하니라. 덕찬이 “잠들어 계시니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기에 덕겸이 파리를 멀리 쫓고 나가려고 일어서니 상제께서 문득 일어나 앉으시며 “너는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느냐. 공사를 보는 중에 그런 법이 없으니 번갈아 먹으라”고 꾸짖으셨도다.

 

 

최덕겸은 처음에는 상제님께서 명하신 일을 받들고자 하는 마음에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잠들어 계시니 괜찮을 것이라”라는 김덕찬의 말을 듣는 순간 상제님의 분부를 잊어버렸다. 최덕겸의 입장에서는 상제님께서 보시든 안 보시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기 위해 집중(集中)해야만 했었다. 상제님의 공사에 참여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명하신 일을 계속 지켜나가야 하지만 자기 생각에 빠져 그 일을 그르치게 된 것이다.

수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이익을 생각하면 방심할 수 있다. 교화를 들었을 때는 도의 일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일상생활로 돌아가 자기 일에 치중할 때 방심하기도 한다. 또한, 상제님의 진리에 맞게 일을 하다가 일의 성과에 집착하게 될 때 자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정해진 규범을 잊어버리고 자기 입장만 고려하다 보면 주어진 일을 그르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인간이 자기 이익에 이끌리기 쉬워 방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죄가 없어도 있는 듯이 잠시라도 방심 말고 조심하라”(교법 1장 36절)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은 자기 욕심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지을 수 있기에 항상 자기 마음을 경계하라고 당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타인에게 잘 드러나지 않는 영역이다. 그렇다 보니 자기 마음을 상대가 볼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순간 자기 이익을 떠올려 방심할 수도 있다. 도전님께서는 “사정(邪正)의 감정(鑑定)을 번갯불에 붙인다고 하셨는데, 신명의 눈은 번갯불보다 더 빠르다. 암실기심(暗室欺心)은 어두운 방에서도 속이지 말라는 것인데, 남이 모른다고 해서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02 사람은 보지 않더라도 천지의 귀와 신이 대대세세 살피고 있다[大大細細天地鬼神垂察]03는 점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정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正)’은 하나 일(一)과 그칠 지(止)라는 두 의미가 합쳐진 회의(會意) 문자이다. 하나라는 것은 일심(一心)의 의미에서 보듯이 한결같이 변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그친다는 것은 목적하는 상태에 머문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바른 마음으로서 정심은 변치 않는 상태로 한결같이 계속 유지해 나가는 마음을 말한다.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통해 선천 상극으로 인해 발생한 원(冤)을 없애고 모든 존재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상생의 후천선경을 이루고자 하셨다. 이런 점에서 천지공사는 한 개인, 한 사회, 한 국가의 이익에만 국한되지 않고 천지라는 영역까지 해당하는 공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렇게 볼 때, 바름이라는 것도 상제님께서 추구하시는 남 잘되게 하려는 해원상생의 이념을 지향할 때 실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도주님께서는 “나의 심기를 바르게 하고, 나의 의리를 세우고, 나의 심령을 구하여, 상제님의 임의에 맡기라”[正吾之心氣 立吾之義理 求吾之心靈 任上帝之任意]04라고 말씀하셨다. 심기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마음의 기운을 바르게 한다는 것으로 바른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심기를 바르게 한다’라는 것은 우리의 천성(天性)인 양심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약간 결이 다르다. 하지만,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리를 세워 심령을 구하는 것이 상제님의 뜻에 따르기 위한 것이라면 결국 그 바름도 상제님께서 하시려는 뜻, 즉 상제님의 진리를 지향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천지공사에 참여했던 종도들의 입장에서는 상제님께서 명하신 일을 어김없이 수행하려는 마음이 정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받드는 우리 도인에게도 해당한다. 상제님의유지(遺志)를 이어받으신 도주님께서는 도법(道法)을 짜셨고 도주님의 유법(遺法)을 이어받으신 도전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할 가르침[遺訓]을 제시해주셨다. 이렇게 본다면 상제님의 진리를 따른다는 마음에서 도주님의 도법과 도전님의 가르침을 어김이 없이 실천하려는 마음, 즉 일심과 집중을 정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심이 상제님의 진리를 지향하며 도법에 맞게 상제님의 일을 실천하려는 마음 자세라고 본다면 방심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이익과 관련된 생각을 버리고 항상 상제님을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도를 모셔야 할 때 상제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모시고 교화를 해야 할 때는 상제님의 진리에 맞게 교화해야 한다. 이렇게 상제님의 일에 부단히 정성을 다하려는 마음 자세가 될 때 사사로운 마음에 빠지는 방심을 거두고 정심을 지속할 수 있다. 자!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한번 살펴보자. 정심해야 할 일에 방심하고 있었던 것은 없었는지 말이다.

 

 

 

 

 

01 권지 2장 30절 참고.

02 「도전님 훈시」 (1992.5.31).

03 공사 3장 40절.

04 교운 2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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