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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 26절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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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2.06.04 조회25,0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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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청일 사이에 싸움이 두 번 나리니 첫 번에는 청국이 패하리라. 다시 일어나는 싸움은 十년이 가리니 그 끝에 일본이 쫓겨 들어가려니와 호병(胡兵)이 들어오리라. 그러나 한강(漢江)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


  상제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날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청국이 허무하게 패한 첫 번째 싸움인 청일전쟁(1894~1895) 이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시기에는 중국을 지칭하는 칭호가 ‘청’이었으나, 이후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淸) 왕조가 무너지고 1912년 손문의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니, ‘청’이라는 명칭을 ‘중국’으로 바꾸어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첫 번째 싸움에 대한 부분은 대체로 이견 없이 정리되나, 두 번째 일어나는 싸움과 호병(胡兵)의 도래, 한강 이남에 대한 설명은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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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께서 예시해 주신 말씀을 그 후의 역사에 대입하여 이리저리 궁리해보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상징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운 면도 있으나, 수도인으로서 가질 수 있을 법한 호기심이라고 생각되며,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 한 방편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위에 말한 논쟁의 여지가 있을법한 부분들에 대해, 지나간 역사를 상제님의 말씀과 비교하며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일어나는 싸움은 十년이 가리니
  중국과 일본의 두 번째 싸움이란 대개 중일전쟁(1937~1945)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중일전쟁의 기간을 얘기할 때 ‘8년간의 중일전쟁’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이는 만(滿) 나이를 세는 것과 같은 계산법인데, 햇수로 세면 9년에 해당하므로 얼추 10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 중국과 일본의 두 번째 싸움은 1931년 일본군의 만주 침략으로 시작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당시 지명으로 봉천(奉天, 현재는 심양) 근처의 철로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인한 폭발이 있었고, 이를 구실로 하여 단 일주일 만에 일본은 프랑스와 독일을 합한 만큼의 영토를 점령했다. 역사는 이를 만주사변이라고 부른다. 1932년 2월에는 상하이에서 3주간의 전투가 벌어져 중국군 1만 4천 명, 일본군 3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3월에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었다. 1933년 1월에는 일본군이 열하(熱河) 지방까지 점령하였고, 5월 1일 양국은 탕구협정(塘沽協定)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중국이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만주 지방의 영토를 일본에 내준 것이었다. 만주사변(1931)이 시작되어 탕구협정(1933)으로 일단 마무리되기까지의 2년과 중일전쟁(1937~1945)의 8년을 더하면 정확히 10년이 되는 셈이다.
  전쟁의 기간도 기간이지만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가리니’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첫 번 싸움에는 청국이 패한다고 분명히 알려주셨으나 두 번째 싸움의 승패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 부분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 일본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다. 전쟁의 양상은 시종 일본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고, 전쟁 막바지에는 사천성과 같은 서쪽의 오지만 남긴 채 중국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이 싸움을 끝낸 것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또, ‘十년이 가리니’라는 표현 속에서는 예상외로 전쟁이 길게 늘어진다는 의미도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본의 우세였고, 국제사회 역시 중일전쟁이 단시간 내에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계속 지도부(수도)를 옮겨가면서 저항했는데, 중간중간 승리를 거둔 전투도 있긴 했지만 대개 수많은 인명피해와 곡창지대를 뺏기면서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중국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장개석을 위시한 국민당 정부의 항전 의지와 미국의 원조 덕분이었다.01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 원조를 해 줌으로써 일본군 50만 명을 중국 전선(戰線)에 묶어둘 수 있었다.

       
    
일본이 쫓겨 들어가려니와 호병(胡兵)이 들어오리라    
  ‘쫓겨 들어가려니와’란 표현을 보면 일본의 철수와 호병(胡兵)의 진입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2차대전 당시의 추축국(연합국과 반대편)은 독일과 일본이었다.02 유럽에서는 1945년 5월 9일 소련이 독일과의 긴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였다. 한편 1945년 2월에 있었던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나머지 연합국들에게 독일을 패전시키고 난 후 3개월 이내에 미국과 일본이 벌이고 있는 태평양전쟁에 가담하기로 약속하였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던 태평양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굳어지고는 있었으나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치를 최후의 전투에서 백만 명 이상의 병력 손실을 예상하였기에,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
  딱 3개월이 되는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과 조선의 북부로 동시에 진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05년의 러일전쟁 때와는 다르게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전혀 적수가 되지 못했고 속수무책으로 ‘쫓겨 들어갔다’. 미국 입장에서는 1945년 7월 16일 실험에 성공한 원자폭탄이 있었기에 굳이 소련을 대일(對日)전쟁에 끌어들여 과실을 나눌 필요가 없어졌다. 일본을 온전하게 점령하고 식민지였던 조선과 만주까지 다 세력권에 두고 싶었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워졌음을 느낀 미국은 38도 선에서 조선을 나누어 각자 세력권에 두기로 소련과 합의를 하였다. 결국 38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에 의해 무장해제가 되었고 38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국에 의해 무장해제가 되었다.

 

202205250937_Daesoon_256_%EC%A0%84%EA%B2 ▲ 소련의 해병대가 뤼순항 함락 후 소련의 깃발을 게양하고 있다. 1945, 10,1 촬영, WIKIMEDIA.

 


  ‘호병(胡兵)’이 들어온다는 말씀은 결국 소련군을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호병이란 ‘오랑캐 병사’인데 주로 한족을 제외한 북방의 이민족을 지칭하던 용어로, 야만적인 병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당시 소련군이 북조선 진입 초기에 보여주었던 행태는 오랑캐 병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패전국 일본의 여성들은 길에 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고, 민간을 대상으로도 각종 약탈을 자행했는데 훗날 북한이 자신들과 이념적 동지였던 소련군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대부분의 기록을 폐기하였으므로 현재 전해지는 기록은 소수에 불과하나, 손목시계를 팔목에 여러 개씩 차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은 한국인들에게 소련군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이 호병(胡兵)을 6ㆍ25 때의 중공군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듯하나, 앞에 언급했듯이 일본이 ‘쫓겨 들어가려니와’의 표현상 1945년과의 시간적 차이가 너무 나고(1950년 10월 중공군 1차 침입), ‘호병이 들어오리라’는 표현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진격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쉽게 장악하는 과정을 설명하기에 더 적합하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가 있었고 만주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한반도에 최초로 진입한 날짜는 12일이었는데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동해안의 최북단 항구인 웅기와 나진을 점령하였고, 16일에는 나진 바로 아래 항구도시 청진03을 점령했다. 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으나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까지 속속들이 전달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며칠 간의 혼란이 있었으나, 24일에 만주로부터 내륙지방으로 들어 온 소련군 주력부대는 말 그대로 걸어서 들어 왔다.
  무엇보다 공사 3장 18절의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와 예악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의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오랑캐)의 칭호를 받는 청(淸)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상제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고 하신 상제님 말씀과 배치된다. 1950년에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중공군은 한국인들에게 오랑캐로 인식된 청(淸)이 아니다. 상제님의 공사대로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청(淸)의 지배로부터 회복된 중국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중공군을 호병(胡兵)으로 볼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이유다.

 

 

한강(漢江)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
  부수적으로 중공군은 1951년 1월 4일 우리 정부가 부산으로 다시 후퇴(1ㆍ4후퇴)한 다음 날 서울을 점령했고, 1월 7일에는 수원, 8일에는 오산까지 진격하여 한강 이남을 한참 (침)범한 역사적 기록도 있다.
  해방 직후, 소련이 서울(경성)을 점령하러 들어온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들어온다던 날짜(8월 17일)가 되어도 소련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38선 아래에 위치한 서울은 미군에 의해서 점령되는 것으로 미·소간 합의가 이미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헛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서울에는 9월 초에 미군이 들어왔다. 소련군은 미국과 당초 합의한 대로 38선 이북까지를 점령하고04 경계선을 확실하게 하였다. 결국 소련군[호병(胡兵)]은 한반도에서 38선까지만 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강(漢江)은 38선과 비교해보면 훨씬 남쪽에 있으므로 당연히 한강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는 상제님 말씀은 실현되었다.05
  지리적인 해석에 더해서, ‘범하다’라는 단어의 어감으로 보면 소련군들은 긍정적이지 않은 존재로 여겨진다. 이 점령은 얼마 후에 공산주의라는 체제로 변화하게 된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상제님의 도(道)가 종교단체의 형태로 펼쳐지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전적으로 보장되는 자유 대한민국에서 수도인들이 상제님의 덕화를 마음껏 선양할 수 있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상제님께서 호병(胡兵)이 한강 이남으로는 자리 잡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상제님께서 예비하신 그곳은 ‘남(南)조선’일 수도, 혹은 ‘남은 조선‘ 일수도 있으리라.

 

 
    
참고문헌
『전경』
길윤형, 『26일 동안의 광복』, 경기:서해문집, 2020.
래너 미터, 『중일전쟁』, 기세찬·권성욱 옮김, 경기:(주)글항아리, 2020.
신복룡, 『한국분단사 연구』, 서울:도서출판 한울, 2001.
오코노기 마사오, 『한반도 분단의 기원』, 류상영 외 2명 옮김, 경기:(주)나남, 2019.

 

 

 


01 장개석의 국민정부군 외에 옌안에 근거지를 둔 모택동의 공산당 군대도 일본과 전투를 벌였으나, 주로 게릴라전을 위주로 하였고, 편제상 장개석 국민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원조에 있어서도 소련은 전쟁 초기부터 중국 장개석 정부에 꽤 많은 원조를 했다. 그러나 1939년 국제연맹에서 핀란드를 침공한 소련을 제명할 때 중국이 소련 편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장개석과 스탈린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 이후로 중국은 소련의 원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1945년까지 버틴 이유를 설명하는 본문 내용에는 기재하지 않았다.
02 이탈리아도 있었으나 편의상 여기서는 제외하고 설명한다.
03 17일에는 나남, 18일에는 부령을 점령했고 이것이 마지막 전투였다. 나남과 부령은 청진부근의 지명이다.
04 소련군이 개성을 점령하기도 했었으나 그곳이 38선 이남이라는 미군 측의 지적을 받고 철수하는 일도 있었다.
05 소련군은 38선 이북의 도시를 점령하고 경계선을 구축한 뒤 남북간에 운행되던 철도마저 끊어서 미·소 점령지역을 명확하게 분리하려고 했다. 단, 양측의 예상할 수 없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1945년 9월 말에 소련군 연락장교가 서울에 파견되었다가 10월 중순에 북으로 다시 철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강 이남은 1970년대 개발이 되기 전까지는 논밭뿐이었으므로 파견지는 당연히 강북지역이었을 것이다. 이 경우를 보아도 소련군(단 한 명뿐일지라도)이 발을 디딘 곳은 한강 이북으로 한정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파고들지 않고 38선만 거론해도 충분할 듯하여 본문에는 기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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