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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과 사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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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23 조회3,2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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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께서 사명기(司命旗)를 세워 전명숙과…의 원을 풀어주셨도다. 상제께서 피노리(避老里) 이 화춘(李化春)의 집에 이르셔서 …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 곳에서 전명숙이 잡혔도다. 그는 사명기(司命旗)가 없어서 포한(抱恨)하였나니 이제 그 기를 세워주고 해원케 하노라.”(공사 3장 2절)

 

사명기(司命旗)란 조선시대 군대의 각 영(營)에서 대장·유수·순찰사·절도사·통제사 등이 휘하 군대를 지휘하는 데 쓰던 깃발로서 특히 왕이 각 군의 합진(合陣)을 친열(親閱)할 때 주로 사용하였다. 사명기의 바탕 색깔은 각 지휘관의 방위(方位)에 따라 황색·청색·백색 등으로 달라지며, 가운데에는 진영의 이름에 따라 ‘~軍司命’이라고 써서 지휘관의 신분을 표시하였다. 즉, 사명기는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군대의 깃발로서 공권력의 상징이었다.

한편 민중의 고통이 극에 달했던 조선 말, 가난한 선비에 불과했던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농민군을 일으켜 조선의 민중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분투하였는데, 군대를 지휘하는 사명기는 커녕 역적의 오명만 씌워진 채 억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서 자는 명숙(明叔) 호는 해몽(海夢)이라 한다.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조선의 체제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반봉건 투쟁과 몰려오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척왜척양(斥倭斥洋)의 대중운동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농민군의 지도자가 되기 이전에는 학문에 열정을 가진 선비이자 가족을 사랑하는 평범한 백성일 뿐이었다.

당시 백의한사(白衣寒士: 가난하면서 벼슬도 갖지 못한 선비)였던 그는 가족의 부양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빈곤한 처지는 나아지는 게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부인도 함께 힘든 일을 하며 살림을 꾸려 나가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부인은 힘든 생의 현장에서 얻은 병마로 인해 일찍 가족의 곁을 떠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이제 남겨진 네 자녀들은 아버지인 전봉준에게만 의지하며 살아나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은 이러한 현실이 그 자신의 단순한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탐관오리의 학정과 외세의 침탈에 기인한 조선사회 전반의 모순된 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비극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안위와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며 살기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자식들을 뒤로한 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든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다.

이리하여 1894년 고부 봉기가 계기가 되어 일어났던 농민군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求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해 나갔다. 그 뒤 정부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으나 정부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서울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대패하고 11월 태인전투를 끝으로 분쇄되고 말았다. 이에 전봉준은 몇 명의 동지들과 순창에 몸을 피해 재기를 꾀하였으나,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 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피노리(避老里)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이듬해 3월에 처형되었다.

그의 희생정신과 나라와 민중을 살리기 위한 꺾이지 않는 굳은 의지는 일본인에게 구금되어 있던 당시에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 당시 일본군은 전봉준에게 가혹한 심문과 함께 달콤한 회유의 의사를 내비췄는데, 그것은 그를 살려주어 조선 침략의 하수인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마침내 3월 29일, 재판장에 끌려나온 전봉준은 감옥에서 당한 심한 고문으로 인해 몸을 가누지도 못 할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정도(正道)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며 대갈일성 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가족도 뒤로 하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였던 전봉준은 도리어 역적이라는 오명만 씌워진 채 그 생을 마감하였기에 그 한이 얼마나 컸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전봉준이 역적이 아닌 조선의 훌륭한 명장(名將)이었다는 것을, 조선시대 군대의 공권력의 상징이었던 사명기를 세워주심으로써 밝혀주신 것이다. 이렇듯 전봉준의 그러한 깊은 속마음까지 헤아려 살펴주시는 상제님의 세심한 배려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대순회보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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