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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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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13 조회3,2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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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께서 속담에 “이제보니 수원나그네라 하나니 누구인 줄 모르고 대하다가 다시 보고
낯이 익고 아는 사람이더라는 뜻이니 나를 잘 익혀두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5장 30절)

흔히 효원(孝園)의 도시라고 일컬어지는 수원은 삼남지방이라 불리는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으로서 예전부터 나그네가 많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제보니 수원나그네’라는 속담도 나오게 됐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일화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정조(1752~1800)는 지극한 효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시호를 사도(思悼)세자에서 장헌(莊獻)세자라 새로이 올리는 한편, 묘소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키고 그 묘호(廟號)는 경모궁(景慕宮)이라 이름 지었다. 1789년에는 18만 냥을 들여 경기도 양주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개칭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용주사(龍珠寺)를 개수·확장해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일반적으로 ‘묘호’란 것은 왕과 대신들이 의논해 정해지는 것이었다. 정조는 대신들의 반대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追尊=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하지 못하였고, 그에 따라 무덤도 능(陵)이라 칭하지 못하고 현륭원이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헌세자를 추존하기 위한 정조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한편 당쟁에 의한 희생양이 되어 아버지가 죽게 된 것이라 본 정조는 장헌세자의 무덤이 있는 수원에 성을 쌓아 강력한 군주국가의 재건을 위한 개혁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수원은 남도와 한양을 잇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서쪽의 발달된 해안을 따라 물산과 사람의 이동이 쉬워 상업이 발달하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결국 개혁의 진원지로 삼기 위한 수원성은 1796년에 완공되었다.

또한 수원성이 완공되기 이전부터 정조는 장헌세자가 묻혀져 있는 수원의 현륭원으로 자주 행차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특별과거인 별시를 시행하여 수원과 인근의 유생, 한량, 군인, 무사 등이 응시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1795년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 열렸던 해의 현륭원 행차 때에는 그가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를 실시하여 문과 5인, 무과 56인의 급제자를 선발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때때로 그는 신분을 감추고 다니면서 관리들의 비행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반영시키기도 하였다.

한번은 정조가 정체를 숨긴 채 장헌세자가 묻힌 화산의 현륭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때 마침 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를 보고 그에게 사도세자의 무덤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정조는 그에게 저 무덤이 어떤 곳이냐고 물어보았다. 이에 농부는 그곳을 뒤주대왕의 애기능이라고 하며, 뒤주 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왕이 되었을 것이기에 뒤주대왕이라 했고, 애기능이라 한 것은 임금님들의 산소를 능이라 하지만 왕이 못되셨으니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 농부는 사도세자를 엄연한 왕으로 인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정조는 크게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반대로 사도세자를 추존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가슴 한편에 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가슴의 응어리를 덜어 준 그 농부에게 무언가 답례를 하고 싶었다.

농부는 사실 학문을 많이 익혔고 실력도 있었으나, 운이 없어 번번이 낙방한 선비였다. 이 사실을 안 정조는 그에게 다시 한번 과거 시험을 보게 권유하였고, 환궁하여 즉시 과거시험을 시행하라는 영을 내리게 된다. 드디어 과거시험이 있던 날, 정조는 현륭원 근처에서 있었던 자신과 어느 농부의 대화와 관련이 있는 과거시제를 내어 그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게 한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정조와 선비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는 왕을 배알하고 보니 그가 바로 그때의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여기서 ‘수원나그네’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구천의 최고신의 신분이셨음에도 지상에 친히 내려오셨다. 그러나 당시 상제님을 따르던 많은 종도들은 수원나그네를 알아보지 못한 농부처럼, 천지를 마음대로 하시는 상제님의 권능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상제님이 누구이신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것은 훗날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에 의해서야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외에 수원나그네에 대한 유래로 숙종 때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숙종이 미복(微服:지위가 높은 사람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입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담배밭 옆을 지나던 중 밭을 돌보고 있던 농부에게 한 잎 얻어 피우기를 부탁하였으나 임금님께 진상하려는 것이라고 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농부는 수확한 담배잎을 가지고 임금께 진상하였다. 그때의 농사꾼이 생각난 숙종은 그 농부를 직접 불러 대면코자 하였다. 숙종 앞에 나가 임금 얼굴을 본 농부는 그때의 수원나그네라고 하여 자기도 모르게 말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방특산물은 지방관리를 통해 궁에 보내지게 되는데 일반 평민이 직접 바치러 갔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리고 숙종이 미복차림으로 도성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수원까지 하루만에 다녀오기란 어려운 일이다. 왕은 그 다음 날 정사를 보기 위해서라도 하루만에 일을 보고 와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원에 다녀왔다는 숙종의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현륭원 참배, 그리고 수원성과 행궁 건축을 이유로 수원에 자주 행차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미복차림으로 수원지역을 둘러 보았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대순회보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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