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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놈’, ‘아전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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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01 조회3,8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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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께서 종도와 함께 계실 때 김광찬에게 “네가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아느냐”고 물으시니 그가 “촌 양반으로 아나이다”고 대답하니라. 다시 상제께서 물으시기를 “촌 양반은 너를 어떠한 사람이라 할 것이냐.” 광찬이 여쭈니라. “읍내 아전이라 할 것이외다.” 그의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촌 양반은 읍내의 아전을 아전놈이라 하고 아전은 촌 양반을 촌 양반놈이라 하나니 나와 너가 서로 화해하면 천하가 다 해원하리라” 하셨도다.(공사 1장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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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전은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근무하던 하급관리로 근무지에 따라 경아전(京衙前)과 외아전(外衙前)으로 구분되었는데, 서울의 경아전을 서리(胥吏)라 하였고 지방의 외아전은 향리(鄕吏)로 통칭되었다. 그들은 신분상 중인에 해당되어 양반과 차별되는 복색을 하였으며 자기들끼리의 통혼에 의해 단단한 결속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전의 기원은 고려시대의 지방 호족으로, 그들은 고려 건국 당시만 해도 지방의 실권자였으나 고려왕조의 지방세력 억압정책으로 인해 말기에 이르러서는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여 지방관청의 실무 담당 관리로 고착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 이들은 이과(吏科)라는 일정한 시험을 거쳐 선발되어 거기에 따른 대우를 받았으나, 16세기 이후부터는 품관 진출이 억제되고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중인층01 으로 전락하여 하급행정실무나 말단 민정•군사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을 보좌하며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아전들은 그 지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으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각 지방에 수령을 파견 하였으나, 이들의 임기는 통상 900일이었고 법의 규정에 따라 연고지에는 부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각 고을에 파견된 수령들은 그 고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 어려워 대대로 그 지역에 살며 지역 사정에 밝은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한편 조정에서는 아전들을 감독하기 위해 학식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던 고을의 양반들로 하여금 수령을 돕는 향청(鄕廳)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각 고을에서는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기 위해 향회(鄕會: 지방에 거주하는 士族이 중심이 되어 운영한 지방자치회의)를 만들었는데, 이 향회에는 향청의 우두머리인 좌수를 선출하는 권한이있었다.

   향회는 마을의 대소사 뿐 아니라 고을의 수령이 관리하기 힘든 아전을 단속하였다. 향회에서는 양반에게 한번 찍힌 아전을 더 이상 아전으로서의 생활이 어렵도록 만들었으며, 또한 선악적(善惡籍)이라는 일종의 고과표를 두어 무능력하고 비리가 많은 아전은 벌을 받고, 청렴한 아전은 호장이나 이방에 임명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양반들이 향회를 중심으로 하여 아전들 위에 군림하자, 아전들의 양반에 대한 반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난 후 농가에 이앙법과 견종법이 보급되면서 생산력 증가에 의한 경영형 부농 또는 광작농이라는 부농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돈으로 양반의 신분을 산 후,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향회에 가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이 향회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향회의 권위는 급속히 하락하여 각 지방에서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일도 벌어졌다. 향회에서 이방으로 앉히려는 사람을 아전들이 거부하고 도리어 향청의 임원을 매수하여 고을 양반들에게 대적

하기도 한 것이다.  

  또한 18세기 이후부터는 조정에서 수령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한편, 그동안 양반의 지주제를 가능하게 해 주었던 향청의 징세권을 관아로 이전시킴으로써 양반들의 위세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양반의 지위를 보장해 주었던 향촌자치제와 지주제는 약화된 반면에 토착기반이 튼튼한 아전들은 포흠(逋欠: 관청의 물품을 사사로이 사용함)을 통해 부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관청에서 빼돌린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일반 백성들은 물론 양반들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

아전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커지자 아전들은 점차 양반들을 무시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는 정약용(丁 若 鏞 :1762~1836)이 쓴『목민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근래 아전의 풍속이 나날이 변하여 하찮은 아전이 길에서 만나도 절을 하지 않으려 한다. 아전의 아들, 손자로서 아전의 역을 맡지 않은 자가 고을 안의 양반을 대할 때 맞먹듯이 너나하며 자(字)를 부른다.

『목민심서』

 

  즉 아전들은 능력은 없으면서도 신분만으로 위에서 군림하고 있던 양반들을 좋게 볼 수 없었고, 양반들 입장에서는 아전들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신분상 그들보다는 아래였기에 계속 천시하였던 것이니 양반과 아전 사이의 골은 점차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양반놈’,‘아전놈’이라고 뒤에서 서로가 서로를 비하하는 그들의 갈등관계는 조선 말기까지도 계속 이어져 상제님 재세시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상제님께서는 당시 아전이었던 김광찬에게 화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양반과 아전 사이의 갈등은 물론 신분과 계급의 차이에서 비롯된 원과 한을 푸시는 공사로 이해할 수 있다.

<대순소식>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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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전근대시대를 통하여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중간계층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지만, 신분개념으로 중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 즉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신분과 직업은 세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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