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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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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작성일2020.08.22 조회1,0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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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한국전통연희사전, 경국사 감로탱 1887 

 

 

“…… 다섯 신선 중 한 신선은 주인으로 수수방관할 뿐이오. 네 신선은 판을 놓고 서로 패를 지어 따먹으려 하므로 날짜가 늦어서 승부가 결정되지 못하여 지금 최 수운을 청하여서 증인으로 세우고 승부를 결정코자 함이니 이 식혜는 수운을 대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시고 “너희들이 가진 문집(文集)에 있는 글귀를 아느냐”고 물으시니 몇 사람이 “기억하는 구절이 있나이다”고 대답하니라. 상제께서 백지에 “걸군굿 초란이패 남사당 여사당 삼대치”라 쓰고 “이 글이 곧 주문이라. 외울 때에 웃는 자가 있으면 죽으리니 조심하라” 이르시고 “이 글에 곡조가 있나니 만일 외울 때에 곡조에 맞지 않으면 신선들이 웃으리라” 하시고 상제께서 친히 곡조를 붙여서 읽으시고 종도들로 하여금 따라 읽게 하시니 이윽고 찬 기운이 도는지라.…… (공사 2장 3절) 

 

 

  위의 구절은 오선위기와 관련하여 조선의 국운을 돌리는 공사 중 일부 내용이다. 이때 상제님께서 주문을 정하시고 송주하는 법을 종도들에게 알려주시면서, 절대 웃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시었다. 웃지 말라 하신 것은 웃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종도들이 웃을 가능성의 요소는 주문의 내용으로 추정된다. 즉 ‘걸군굿·초란이패·남사당·여사당’이 그것이다. 이들은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 후기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다양한 공연을 하거나 풍물굿을 하였던 무리다. 이들은 공연에서 여러 해학과 풍자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고, 관중들로 하여금 많은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이 무리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우스운 공연 내용을 연상하고 웃음을 자아낼 수 있기에 상제님께서 공사 중에 웃음을 엄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이들 중에 ‘남사당·여사당’에 해당하는 사당패(社堂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남사당’·‘여사당’이라는 명칭은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용어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 ‘사당패’였으며, ‘남사당패’가 형성되면서 이와 대비되는 ‘여사당패’라는 명칭도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01 즉 남사당패와 여사당패는 사당패가 분화하면서 생성된 무리의 명칭이다.

  ‘사당(社堂)’이라는 용어는 본래 ‘국사당(國祠堂)’과 같이 고려 때부터 무당(巫堂)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을 의미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 사찰에 딸린 건물로서 ‘사사(寺社)’라는 불우(佛宇)가 있었는데, 이 건물이나 이곳에 거하면서 불사(佛事)를 행하는 여인들을 ‘사당’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02 이곳에 모인 여성들은 실행(失行)한 처녀들이나 지아비와 가정을 버린 여인들로 기록되어 있는데,03 이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가정을 버리고 이곳에 모였다기보다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정을 나와 갈 곳을 잃은 상태에서 새로이 정착하여 삶을 도모한 곳이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사(寺社)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 이들은 주로 회사(回寺)·회사자(回寺者)라 불렸는데, 이는 사찰을 옮겨 다니며 불사를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과 함께 거주하며 불사를 했던 남성들은 주로 거사(居士)04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7세기 초부터는 사찰의 사사(寺社)가 널리 ‘사당(社堂)’으로 불리면서 이곳에 거주하던 여성들도 ‘사당’으로 불렸으며, 이후 ‘社堂·社黨·捨堂·舍當·寺黨·舍黨’05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하였다.06 

  이들은 당시 거사(居士)들과 함께 불교 행사의 수요가 있는 여염(閭閻) 등을 다니며, 불사(佛事)를 행하며 복(福)과 안녕을 기원해주기도 하고, 큰 저자를 다니며 판염불07을 하며 시주를 걷었으며,08 사찰 내에서 ‘음성공양(音聲供養)’이라고 하여 불교음악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당패는 사찰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불경의 간행, 범종의 주조, 석비(石碑)의 건립에 즈음하여 많은 시주를 하였으며, 이러한 이들의 역할 때문에 여러 감로탱화(甘露幁畵)에 사당이 등장하기도 하였다.09  그리고 이들은 도첩(度牒)이 있는 정식 승려가 아님에도 육지와 바다에 떠도는 고혼(孤魂)을 위로하고 아귀를 위로하는 불교 의례인 수륙재(水陸齋)를 거행하기도 하였다.10

  이들의 모습과 역할은 17세기 중반부터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전에는 화주승(化主僧: 인가에 다니면서 염불이나 설법을 하고 시주를 받아 절의 양식을 대는 승려)과 거사·사당의 역할이 구분되었지만, 이때부터는 거사와 사당이 화주승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거사와 사당이 부부관계를 맺어 가족이 함께 시주를 다녔다. 이들의 복색은 매우 화려하여 공연자로서의 복색이 갖추어졌다. 이로써 이들은 사사(寺社)에 소속되거나 사찰과 유기적 관계를 맺으면서 주로 사찰의 화주(化主)로서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공연자로서의 면모도 갖추어나갔다.

  조선의 지속적인 억불숭유정책으로 18세기부터 조선의 사찰은 급격히 쇠락했으며, 승려의 수도 급감하였다.11 따라서 거사와 사당들은 더는 한 사찰에 머물며 활동할 수 없게 되어, 패(牌)를 지어 독립적으로 살길을 찾아 본격적으로 유랑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사람들은 ‘가리내패’ 또는 ‘사당패’라고 불렀다. 이들은 여러 장시와 민가 마을을 떠돌며, 대중들의 오락적 요구에 부응하는 공연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19세기 접어들면서 이들은 염불류의 소리보다는 점차 여러 속요(俗謠)를 부르고, 춤을 추며 연극을 하는 등의 공연을 통하여 수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연의 기회가 없을 때는 생존을 위해서 걸식을 하거나 매춘을 하기도 하였다.12 이러한 과정에서 사당패의 공연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기예가 발달하고, 더불어 성적인 희롱도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당패는 사회적으로 패륜을 일삼는 무리로 지탄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지탄과 함께 쇠퇴하여 갔다. 그나마 남아있던 사찰에서도 사회적 지탄을 받는 사당패 대신에 따로 걸립패13를 구성하여 필요한 때에 활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당패에 여성의 유입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남자로만 구성된 무리가 생성되었고, 이들은 ‘남사당패’14로 불렸다. 이와 달리 구성원에 여성이 포함된 기존의 사당패는 남사당패에 대비하여 ‘여사당패’라고 불렀다. 사당패의 이러한 분화는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자기 생존을 위해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5 이러한 사당패는 20세기 초에 거의 사라지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기예를 선보이는 또 다른 형태의 남사당패가 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16

  사당패는 19세기 말에 갑자기 사회적 지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조선이라는 유교 중심사회에서 이들은 불교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에서부터 조선의 기득권에게 비난을 받을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시대 내내 기득권을 가진 유학자들로부터 사찰의 불우(佛宇)인 사당(社堂)을 없애자는 건의가 끊이지 않았고, 유교적 관점에서 사당인 여성들의 행실과 농사를 짓지 않는 거사들은 비판받아왔다. 그리고 18세기 이후에 사찰들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더 이상 불교에 의지하지 못하고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생존을 위해 적응해 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 적응 과정에서 또다시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들은 줄곧 사회의 최 하층민으로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유랑하는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한편 이들의 활동 중 특기할 만한 것이 있는데, 하나는 이들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동학군이 진군할 때 앞에 나서서 이들을 독려하는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이를 ‘동학당’의 앞을 끌었다 해서 ‘당악가락’, 또는 ‘동학군의 길가락’이라는 말을 줄여서 ‘길군악’이라고 하였다. 조선사회의 최하층민으로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동학군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흔적은 그들의 공연 중 버나(대접돌리기)의 ‘단발령 넘는 사위’17나 어름(줄타기)의 ‘녹두장군 행차18​ 등에 나타난다.

  또 하나는 이들이 전국을 떠돌면서 여러 민요를 전파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양산도(陽山道)타령이라는 점이다. 경기도의 향토민요로 잘 알려진 양산도는 사당패의 레퍼토리 중 하나로 사당패의 선소리19에서 비롯되었다. 사당패가 전국을 유랑하였으므로 경기도뿐 아니라 평안·황해·충청·전라 등 전국적으로 전파되어 있었다. 특히 전라도에서는 지역 문화의 특수성에 힘입어 기층음악문화로 깊이 수용되어 현대까지 잘 전승되었다.20 양산도의 사설은 지역마다 다르나 후렴구는 “세월아 봄철아 오고가지마라 장인의 호걸이다 늙어간다 / 일락은 서산(日洛西山)에 해 떨어지고 월출동령(月出東嶺)에 달 솟아온다 / 삼산은 반락에 모란봉(三山半落牧丹峯)이요 이수중분에 능라도(二水中分綾羅島)로다 / 에라 놓아라 아니 못 놓겠네 능지를 하여도 못 놓겠네”의 내용이 대체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상제님께서 금산사 미륵불을 양산도에 비유하신21 만큼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상제님께서 국운을 돌리는 공사에서 왜 조선 후기의 유랑연희집단들을 지칭하는 용어들을 주문으로 사용하셨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하신 22 해원상생의 맥락에서 사회적 최하층민으로서 살아간 사당패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01 장휘주, 「사당패 관련 명칭에 대한 사적 고찰」, 『공연문화연구』13, (2006), pp.381-382. 

02 장휘주, 「사당패의 집단성격과 공연내용에 대한 사적 고찰」, 『한국음악연구』35, (2004), p.227 .

03 『성종실록 32』, <성종4년 7월 18일 정미>.

04 ‘거사(居士)’는 조선 초기에 ‘사장(社長)’으로 불리었는데, 사장은 고려 말에 각 마을에 학문이 있고 점잖은 노인을 사장으로 뽑고, 이들로 하여금 천민과 상공인 자제들을 각각 자기 직업에 종사하도록 함으로써 개경과 지방도시에서 무리를 지어 노는 현상을 없애도록 한 것인데, 이것은 사장의 기본 임무가 당시 급격히 성행한 천민 출신 광대들의 활동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문성렵·박우영, 「제4절 사당패의 발생」 『조선음악사』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따라서 고려 말의 사장이 조선조에 이르러 예인들의 장(長)을 말하는 것으로 내용이 변화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거사라는 용어는 유마거사(維摩居士)에서 유래한 용어이다.(장휘주,「사당패의 집단성격과 공연내용에 대한 사적 고찰」, 앞의 글, pp.228-229. 참조.)

05 각각의 의의는 ‘장휘주, 「사당패 관련 명칭에 대한 사적 고찰」, 앞의 글, pp.368-369’ 참조.

06 장휘주, 「사당패의 집단성격과 공연내용에 대한 사적 고찰」, 위의 글, p.227.

07 사당패들이 사찰을 대신하여 마을을 돌며 시주를 받는 소리판을 벌일 때 벽사(辟邪)나 축원을 위해 부른 불가의 언어로 된 소리.(손인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3)).

08 문화재관리국, 『문화재대관(무형문화재편)』 (1983), p.38.

09 감로탱의 하단부는 사회생활, 현실생활을 묘사한 내용으로서 그 주제가 인생의 고통, 재난, 인생무상을 표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에 귀의하고 해탈하도록 의도하고 있지만, 오히려 당시의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감로탱의 하단부에 묘사된 다양한 유랑예인집단과 그들의 연희도 현실생활의 일부를 사실적으로 반영한 결과이다.……묘사된 연희집단은 사당패·남사당패·초라니패·풍각쟁이패 등 모두 유랑예인집단이다. 이 유랑광대들은 각지를 떠돌다가 죽은 후에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된다.……(전경욱. 「감로탱에 묘사된 전통연희와 유랑예인집단」, 『공연문화연구』20, (2010), p.163.).

10 장휘주, 「사당패의 집단성격과 공연내용에 대한 사적 고찰」, 위의 글, p.232.

11 이순규, 「조선후기 사찰 지역의 변화」『청람사학』3, (2000), p.289.

12 장휘주, 「사당패의 집단성격과 공연내용에 대한 사적 고찰」, 위의 글, p.235 참조.

13 사찰에서 건축이나 여러 불사(佛事)로 인해 자금이 필요할 때 따로 구성하여 여러 곳을 돌며 시주를 받는, 조선전기의 사당패의 역할을 했던 무리. 예능이나 기예에 있어서 사당패보다 수준이 낮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남사당패와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심우성, 「남사당패」『역사비평』, (1994). p.326. 참조.)

14 그 명칭이 남사당패인 것은 남자로만 구성되었기 때문이며, 이 용어의 사용 시점은 대체로 ‘사당패’가 소멸해 가던 19세기 말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결성된 ‘남사당패’는 그 명칭만 20세기 초의 ‘남사당패’에서 가져왔을 뿐, 공연내용은 전혀 다르게 변질되었다. (장휘주, 「사당패 관련 명칭에 대한 사적 고찰」, 앞의 글, p.382.)

15 장휘주, 「사당패 관련 명칭에 대한 사적 고찰」, 앞의 글, p.382.

16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남사당놀이 여섯 가지(풍악·버나·살판·어름·덧뵈기·덜미)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정착된 놀이이며 20세기 초반까지 있었던 사당패의 공연과는 다르다. 일제시기 이전에는 주로 노래와 춤·연희가 주를 이루었다.(장휘주, 「사당패 관련 명칭에 대한 사적 고찰」, 앞의 글, p.382. 참조.)

17 ‘단발령 넘는 사위’는 버나놀이에서 버나를 왼손으로 돌리다가 등 뒤로 손을 꼬아 오른쪽 겨드랑이 밑을 지나 앞으로 올려 돌리는 동작으로(장충덕, 「남사당패어휘」『방언학』24, (2016), p.37.), 이를 공연하며 하는 재담 중 “훠이 훠이 아랫녘 새여 웃녘 새여 단발령 가파른 고개, 우궁고개(우금치) 발빠진 고개, 훠이 훠이 넘가가기가 장히 어렵것다!” 가 있다.(심우성, 앞의 글, p.366)

18 줄타기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는 동작으로(장충덕, 「남사당패어휘」『방언학』24, (2016), p.39.) 녹두장군행차를 나타내는 당당한 몸짓으로 줄 위를 오가면 길군악이 크게 울려퍼지는데 이것이 남사당 어름의 마지막 장면이다.(심우성, 앞의 글, p.366)

19 전통사회의 전문 음악인들이 공연용으로 부르는 성악곡 중 연주자가 서서 노래 부르는 실외 성악곡의 총칭.(한국민속대백과사전, 김영운)

20 손인애, 「향토민요 양산도타령 연구」『한국음악연구』39, (2006), p.110.

21 예시 15절.

22 권지 1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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