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의 매체, 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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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1.12.11 조회1,218회 댓글0건본문
교무부 김귀만
도무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어느 순간 해결되거나 과학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조화가 눈 앞에 펼쳐졌을 때, 우리는 그 원인을 상제님의 덕화로 돌리곤 한다. 이러한 일을 경험한 수도인은 ‘상제님의 덕화를 입었다’거나 ‘상제님의 덕화를 모셨다’는 표현 등으로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상제님을 신앙하는 수도인으로서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부주의나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정의 결과를 얻었을 때도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과연 합당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그것이 합당한지 여부를 떠나 상제님의 덕화를 어떤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우리의 수도 생활에 도움이 될지 생각하게 한다.
덕화의 사전적 의미는 “옳지 못한 사람을 덕행으로 감화시킴” 혹은 “옳지 못한 사람을 어질고 선한 행동으로 바람직하게 변하게 함”01이다. 이 의미를 고려하면 덕화는 덕행을 베푸는 주체와 그것에 감화되는 대상이 전제된다. 또 조선 시대 실록이나 문집을 참고하면 덕화는 통상 ‘군왕지덕화(君王之德化)’처럼 임금이라는 지위에서 사용된다. 이를 감안하면 덕화는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혹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혹은 바른 곳에서 바름이 필요한 곳을 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낮은 곳은 높게, 어두운 곳은 밝게, 바르지 못한 곳은 바르게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상제님께서 ‘베푸신 일’과 그 일이 인간의 삶에 어떤 ‘방향성’을 제공해 주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제님께서는 우주의 만유(萬有)를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로 주관하시므로, 이것을 상제님의 덕화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강세하신 상제님께서는 인류의 진멸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천지공사를 행하여 인류를 구제하시니 이러한 대역사를 통해 상제님의 덕화를 한층 깊게 느낄 수 있다. 선천에서 인류는 파멸의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이 어떤 길 위에 서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상제님께서는 인류가 그러한 길로 들어서게 된 이유에 대해 선천을 지배한 상극과 그로 인해 발생한 원한이 삼계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셨다. 그리고 천지공사를 통해 만고에 쌓인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우셨다. 이는 인류가 나아가는 삶의 방향을 상극과 원한에서 상생과 해원으로 반전시켜 파멸에서 구하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천지공사는 사멸에 빠진 창생을 널리 건진다는 ‘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는 일관된 방향성을 지닌다.
우리는 상극의 참상에서 인류를 살린다는 광제창생이라는 측면에서 상제님의 덕화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과 자기 가족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한 사고나 불행이 무위이화로 원만하게 해결될 때 그것을 상제님의 덕화로 느끼지만, 이러한 일만을 덕화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상제님의 도를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상제님의 덕화를 스스로 노력 없이 누리는 게 아니라 그 덕화를 ‘광제창생의 덕화’라고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도인으로서 해야 할 바를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덕화를 입을 수 있다는 수도의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덕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도 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우리가 수도하는 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포덕과 교화, 그리고 체계 질서라는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포덕과 교화에 관해 살펴보자. 포덕에 대해 도전님께서는 “해원상생 대도의 참뜻을 전하는 것이 포덕이며, 포덕천하가 되어야 광제창생이 된다”02라고 말씀하셨다. 포덕이란 상극과 원한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천지공사를 행하신 상제님의 광제창생의 덕화를 널리 알리고 이를 근거로 한 해원상생의 이념과 윤리를 대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포덕을 하면서 스스로가 상생을 실천하는 도인이 되고, 타인 역시 상생을 실천하는 도인이 되도록 이끌 수 있다. 이러한 해원상생의 대순진리가 온 세계로 퍼질 때 광제창생의 덕화가 실현된다.
포덕은 도의 진리대로 행해야 하고 그 진리는 주로 교화를 통해 전달된다. 도전님께서 “우리 도는 구천상제님의 천지공사로 인한 광제창생의 덕화를 널리 펴는 것이니, 임원들은 도의 진리를 깨닫도록 가르쳐 나가는 도인 육성의 교육에 성심ㆍ성의를 다하여야 하며…”03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광제창생의 덕화를 펴기 위해서는 도인을 육성하는 교화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원상생 대도의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것이 교화의 기본이 되는 것이니 이를 통해 광제창생의 덕화가 수도인 각자에게 각인될 수 있다.
우리는 천지공사에서 상제님의 광제창생의 덕화를 느끼고 그 덕에 감화되어 해원상생 대도에 동참하여 수도하고 있으며, 포덕과 교화를 통해 광제창생의 덕화를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수도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상극에서 상생으로, 포한(抱恨)에서 해원을 지향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상제님의 덕화를 입은 것이 된다.
둘째로 포덕과 교화와 더불어 우리의 수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체계 질서에 대해 살펴보자. 광제창생의 덕화는 포덕을 통해 우리 외부로 향하지만, 우리 내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대순지침』에 따르면, “덕화는 조직체계를 굳건히 하고 질서를 확보하는 매체(媒體)가 되므로 덕화 선양에 도인들은 각별히 힘을 모아야 한다.”04라고 명시되어 있다. 우선 매체(媒體)라는 것은 매개(媒介)가 되는 물건이나 방법을 말한다. 매개라는 것은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것이다. 다리가 없으면 양자(兩者)는 만날 수 없다. 매체의 예로 ‘문자’를 들 수 있다. 통신 시설이 없었던 옛날에는 사람들끼리 편지로 소통했다. 편지에 쓰인 내용을 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그 ‘문자’를 알고 있어야 한다. 한문이나 한글과 같은 문자가 매체가 되어 서로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덕화’가 ‘매체’가 되기 위해서는 도인 상호 간에 덕화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조직체계를 굳건히 하고 질서를 확보한다’라는 것은 도인 상호 간의 관계에서 이룩되는 것이므로 덕화가 매체로 존재하는 지점은 이러한 관계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덕화는 ‘광제창생의 덕화’를 의미한다고 본다. 체계와 질서가 굳건하고 순조롭게 되기 위해서는 도인 간의 관계가 ‘광제창생이라는 방향성’과 일치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체계 질서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우리의 삶이 광제창생의 방향성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도인들이 체계 속에서 성실한 마음으로 포덕과 교화에 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해원상생을 지향하는 인격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체계 내의 상호 관계가 굳건해지고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상제님의 덕화가 내려오는 통로가 도인 간의 해원상생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포덕과 교화로 해원상생의 이념과 윤리를 실천하며 상제님께서 펼치신 광제창생의 덕화를 구현하려는 존재다. 이처럼 선각도 상제님의 덕화를 실천하고 후각도 상제님의 덕화를 실천하니 우리는 모두 상제님의 덕화와 함께하는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도인들이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생의 실천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이처럼 광제창생의 덕화를 매체로 인식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해원상생의 원리로 타인에게 다가간다면 덕화라는 하나의 다리에서 만나 모두가 화합할 수 있을 것이다.
0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국어사전편찬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서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9), p.1563.
02 《대순회보》 3호, 「도전님 훈시」.
03 「도전님 훈시」 (1985. 11. 13).
04 『대순지침』,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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