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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19 조회2,5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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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며 민간에서 전승되는 무속의 사제자(司祭者). 신의 의사를 탐지하여 이를 인간에게 계시해주는 영매자로서의 구실을 맡게 된 무당. 일반사회인들과는 구별되며 수백 년에 걸친 사회적 천시와 정치적 억압 속에서도 그 명맥이 지속되어 우리 전통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 무당의 기원

 

『주자어류』에 의하면 ‘무’는 춤을 통하여 신을 접하기 때문에 공(工) 자의 양측에 두 사람이 춤을 추는 형상을 취한 ‘巫’ 자를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무당은 춤으로써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 신과 접하게 되고, 거기에서 신탁을 통하여 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무당의 기원에 관하여 『무당내력』01에 따르면 “태초에 10월 3일 신인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와 신교(神敎)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가르치니 이를 시조단군이라 하고 그의 큰 아들 부루는 단을 쌓고 토기에 곡식을 넣고 짚을 엮어 부루단지(扶樓檀地) 또는 업주가리(業主嘉利)를 만들고 노파로 하여금 제를 올리게 하였으니 이를 무녀 또는 무당이라 일컫게 되었다” 고 한다.

 

이 당시 민간에서는 무속을 신교라고도 하였으며 그 신교의 기원을 단군신화에서 찾고 있는데 사학자 이능화(李能和,1869~1943)02도 같은 견해이다. 즉 단군신화에는 단군이 천신인 환인과 지신인 웅녀 사이에서 태어나 풍, 우, 곡물, 인간의 수명, 질병, 형벌, 선악까지 담당하는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는 하나의 샤먼03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도 무속을 인류의 역사와 함께 탄생한 원시신앙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 무당의 역사

 

자연현상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농경사회에서는 자연에 대한 의지뿐만 아니라 공포를 몰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신화와 종교적 의례가 탄생하였다.

 

『신라본기』에서는 제2대의 왕, 남해의 칭호 자체가 무당을 의미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불교가 고구려의 소수림왕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부딪힌 것은 우리 고유의 신앙체계인 무속의 저항이었을 것이다. 신라 이차돈의 순교 기록과 불교 전래 150년 후까지 무불상쟁(巫佛相爭)이란 것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왕건을 태조로 하여 개국한 고려에 와서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불교 문화권으로서 왕건의 비호 아래 불교는 호국과 관 주도의 종교로 변해갔다.

 

현종 12년 5월에 토룡(土龍)을 남쪽 궁궐 뜰에 만들고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다는 것이 고려사에 처음 등장하는 무속의 내용이다. 17대 인종 때에 무인(巫人)과 복자(卜者)가 왕의 병을 치료하였다는 기록과 충선왕 때 좌정승 강융(姜融)의 누이(妹)같이 귀족출신 여자가 입무(入巫)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능화는 이것이 이른바 의종(毅宗)대부터의 ‘선관(仙官)’ 명칭이며, 이들은 민족적 대제전인 팔관회를 주재했다고 보았다. 이처럼 무속의 신앙체계는 고려시대에 그 발달이 절정에 다다랐다.

 

조선은 건국 후 『경국대전』에서부터 민간신앙을 억압했고, 이러한 조문은 고종대의 『대전회통』 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금령은 모두 지켜지지는 않았고 역대로 궁중호무(宮中好巫)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호무하여 제를 지낸 기록은 궁중의식에 소용되는 물목과 건수(件數)를 적은 궁중 발기(發起)로도 알 수 있다. 조선중기까지 무당은 국가와 왕실의 기복 양재(祈福禳災)를 책임진 의례전문가였다. 16세기 들어서는 무속 국행별기은(國行別祈恩)04이 종식되고, 17세기에 무속 국행기우제가 일단락되었으며, 최종적으로 18세기에 무의가 국행활인(國行活人) 활동의 자리를 상실하면서 무속은 공식종교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체제와 왕도로부터 밀려난 무의는 안심(安心)을 바라는 대중의 욕구에 효과적으로 반응하였다. 유교는 분리정책을 통해서 무속의 체질이나 신념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무속은 약화된 것이 아니라 공식종교로부터 밀려난 민중들 속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 인간과 신의 중재자로서의 무당

 

무당은 인간과 신의 중재자로서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알리고 신의 결정을 다시 인간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역할은 평소의 상태로는 불가능하고, 춤이나 노래를 통해서 몰아의 경지에 빠져 자신을 잊고 신의 대리자가 되어야 가능하다. 즉 무당은 사제로서 신령께 향을 올리며, 병굿과 같이 치병의 일도 하며 점을 치는 일 등을 한다.

 

무당의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서울 중부 이북 지방의 무당(여자)ㆍ박수(남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무당ㆍ당골ㆍ당골래ㆍ성방ㆍ화랭이, 제주도 지방의 신방(神房)05이라 불리는 것 등이 있다. 이들에 대해선 흔히 무당이란 말로 총칭한다.

 

무당의 종류에는 강신무와 세습무가 있다. 강신무는 무병(巫病)에 걸려 신이 내리고, 신을 신당에 모시고 굿을 하는 사람이다. 세습무는 가계에 의해 사회적 신분으로 무업을 이어받아 굿을 하는 사람이다. 강신무가 중부 이북 지방에서 지배적인 데 반하여, 세습무는 한반도 남부에서 지배적이다.

 

강신무는 대개 한 마을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몇 개의 마을, 때로는 마을을 초월해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활동한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어떤 ‘집’과 ‘개인’을 단위로 관계를 맺는 것이지 마을이 단위가 되는 일은 없다.

 

반면에 세습무는 원칙적으로 마을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전라도에서는 이러한 단골관계에 있는 무당을 ‘당골’이라고 한다. 이들은 대대로 무계를 이어가면서 마을 안의 종교적 행사인 무의를 행하게 마련이다. 당골의 사회적 지위와 직업은 극히 천시되면서도 전문화되었다. 당골 이외의 사람은 당골의 무업을 부정(不淨)하게 여기며, 당골과는 결혼도 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차별하였다. 당골의 활동권은 담당하는 마을에 제한되며, 그 활동권을 ‘당골판’이라고 하며, 이것을 지키게 되어있다. 남의 당골판을 침입하면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도시화는 강신무의 무대를 더욱 확대하게 만들었고, 세습무의 존재를 어렵게 만들었다. 현재의 한국 무속은 강신무가 중심을 이룬다.

 

 

⊙ 무당이 펼치는 다양한 종교의식들

 

무속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의 요소를 꼽으라면 굿이라 할 수 있다. 굿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다. 굿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절차가 필요하다. 굿을 할 날짜가 정해지면 무당은 굿당을 빌리고 함께 무당과 악사들을 섭외한다. 이때 필요한 무당의 숫자는 보통 3명인데 주 무당 한 사람에 보조 무당 두 사람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 굿을 할 때의 경우이고 별신제06 같은 큰 굿을 할 때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무당들이 참여한다. 별신제에는 강릉 단오제, 하회 별신굿, 은산 별신굿 등이 있다. 별신제는 대체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굿으로 며칠씩 하기 때문에 비용도 만만치 않아 몇 년에 한 번씩 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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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굿을 할 때 무당이 3명이나 필요한 것은 무당 한 사람이 하루 종일 굿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굿이란 보기에 따라 노래와 춤이 그 핵심 내용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뮤지컬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악사의 경우는 좀 융통성이 있다. 굿을 부탁한 사람이 돈을 많이 내면 가장 정식에 해당하는 젓대[민속 대금], 피리, 해금 부는 세 사람으로 구성되는데 이렇게 악기를 셋 ‘잡히면’ 제일 규모 있게 하는 굿이다.

 

굿은 주 거리가 시작되기 전에 ‘부정 거리’부터 행한다. 부정 거리는 말 그대로 굿판에서 부정한 것들을 몰아내고 자리를 정화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때 무당은 노래를 부르면서 술을 여기저기에 뿌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굿판을 정화해 신성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무당은 이 지역을 정화시키기 위해 잡귀들을 물리치지만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는다. 성공적인 굿을 위해 저급한 신들은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는 것뿐이다. 이렇게 굿판이 정화되면 굿이 시작된다. 이 뒤부터는 열두 거리가 연행되는데, 거리의 기본 구조는 보통 세 단계로 구성된다. 신을 초지하는 청신(請神), 그 신을 즐겁게 해서 공수[계시]를 받는 오신(娛神), 신을 보내는 송신(送神)이 그것이다. 무당은 이 세 단계에서 각각 노래와 춤으로 신령을 모신 다음 즐겁게 해주고 다시 보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래서 ‘굿을 한다’는 표현과 함께 ‘굿을 논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자신의 입을 빌어 신의 말을 전하는데 이것이 굿의 핵심이다.

 

굿이 벌어지면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전통 시대에 마을에서 굿이 벌어지면 그야말로 축제 판이 벌어져 온 동네가 들썩거렸지만 이제는 이런 촌락 공동체가 사라졌으니 굿판은 더 이상 그런 기능을 할 수가 없다. 굿판에서 나는 음악 소리가 현대인들에게는 소음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상황이 이러하니 무당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더 산 속으로 들어가 굿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인간문화재로 선정된 무당

 

경제 개발에 성공하고 과거 전통을 돌아볼 만한 여유가 생기자 서서히 무속은 가시적으로 사회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문적으로 접근할때는 ‘무속’이라는 표현 대신 ‘무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무당들이 근대적인 의미의 조직인 대한 경신연합회를 만들었다. 무당의 수를 대체로 20여 만 정도라 보고 있는데 사실 변변한 조직도 없는 무당이 이렇게 많은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또한 정부에서 정하는 인간문화재에 무당이 선정됐다. 이것은 아마도 한국 무교사에서 최초로 무교가 공식적으로 법적인 인정을 받은 셈이다. 물론 종교로서 무교가 아닌 무당의 예술적인 재능에서 인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무형문화재로 10개 이상의 마을굿[혹은 별신제]이 지정됐으며 강릉 단오제는 유네스코에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에는 한국의 유산 중 3개가 포함되어 있는데 단오제, 종묘제례, 판소리가 그것이다. 종묘제례는 유교와 직결되어 있는 것인 반면, 단오제와 판소리는 무교와 직결되어 있다. 판소리는 남도 굿판인 시나위 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악사들이나 무당들이 노래하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의 전통예술이 무당의 행위와 매우 연관성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사물놀이 또한 농악에서 나온 것이고 농악은 마을 굿을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니 모두 굿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수백 년 동안 다양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무당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여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들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학으로도 치유가 안 되는 병[神病]이나 집안의 계속적인 우환 등의 이유로 무당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기에 무당의 수(數)도 꾸준히 늘어났다고 본다. 앞날을 정확히 내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존재하겠는가? 역(易)이 바뀌고 있는 시기에 점이나 상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너무 의존해도 문제가 될 것이다. 무당의 행위는 이 지구상에 많은 종교행위가 존재하듯이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을 볼 때 보다 넓은 시각과 다양한 측면에서 무당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참고 문헌

 

ㆍ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권, 1995.

ㆍ 최종성, 『조선조 무속 국행의례 연구』, 일지사, 2004.

ㆍ 김일권, 『무속에 있어 무당의 역할 연구』, 한국다큐멘터리사진학회, 2004.

ㆍ 최준식, 『무교』, 모시는 사람들, 2009.

ㆍ 조아란ㆍ조효순, 『조선시대 무속복식연구』, 한국복식학회, 1997.

ㆍ 홍기원, 『무당내역』,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01 조선조 말기에 난곡(蘭谷)이라는 사람이 서울 지역의 무당이 행한 열세 가지 굿거리를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책자이다.

02 1910년 국권 강탈 후에 조선사 편찬 및 종교를 비롯한 민족 문화 각 분야에 걸친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저서에 『조선 무속고(朝鮮巫俗考)』, 『조선 기독교급 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 등이 있다.

03 샤머니즘에서 신령ㆍ정령ㆍ사령(死靈) 따위와 영적으로 교류하는 능력을 가지며, 예언ㆍ치병(治病)ㆍ악마 퇴치ㆍ공수 따위의 행위를 하는 사람. 북미 인디언의 주의(呪醫)나 우리나라의 무당도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04 국가의 안정과 평안을 위하여 명산대천에서 지내던 산신제의 하나.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05 제주도민 사이에서는 심방이라고도 한다.

06 제관(祭官)이 주도하는 유식형태(儒式形態)의 당제가 중심이 되는 것.

 

<대순회보 1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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