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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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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18 조회2,3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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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마을에서 사라져가며 소설이나 옛 이야기에 나올 법한 서낭당을 보라. 기댈 곳 없는 이 땅의 가난한 서민들이 아픔을 달래며 정성을 다해 빌던 곳이며,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두려운 곳이지만 마을을 보듬고 지켜주던 수호신이었음을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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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관령 국사성황당 옆 돌무더기 서낭당
 
  마을 입구나 당산터, 고갯마루, 산록 등에 위치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돌무더기를 흔히 ‘서낭당’이라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마을이면 서낭당이 있었다. 서낭당은 보통 고갯마루나 큰길가 등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마을과 토지를 지켜준다고 믿었던 존재가 서낭신인데, 그 서낭신이 붙어사는 오래된 나무[신목(神木), 신수(神樹)]나 돌무더기를 일컬어 서낭당이라고 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서낭신을 모시는 사당을 짓기도 했는데 이를 ‘당집’이라고 불렀다.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고 잡귀나 병을 막아주는 역할 외에도, 그리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마을 어귀의 서낭당까지 나가 하염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 서낭당의 기원과 역할
  서낭당은 돌무더기와 신목(神木), 당집 등이 단독으로 또는 복합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특히 신목과 제단이 복합된 형태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神檀樹)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어 서낭신앙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칭에 있어 산왕(山王)이 ‘선왕’으로, 선왕이 ‘서낭’으로 변이(變移)한 것으로 보고 서낭신앙의 근원을 산신신앙에서 찾기도 한다. 서낭당은 지방에 따라 ‘성황당(城隍堂)’, ‘할미당’, ‘천왕단’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서낭당을 성황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생각되나, 우리의 서낭당과 중국의 성황당은 아무런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우리 농촌에서는 성황이라고 부르는 예가 없으나 단지 한학자들이 서낭당 현판에 성황당이라고 표기하였기에 혼선을 빚은 것 같다. 중국의 성황은 본래는 도성을 보호하는 신으로, 우리나라에는 고려 문종 때 들어왔으며 그 후에 관(官)이 주도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중국의 성황당은 도교적 요소와 민간신앙이 결합되어 벽사 와 풍농·풍어 및 망혼(亡魂)을 관장하는 신적 존재로 변화하였다.
  몽골의 ‘오보’는 서낭당의 돌무더기와 흡사하다 하여 자주 관련지어 설명을 한다. 오보는 마을을 수호해주고 주민들의 안녕과 풍요를 보살펴주는 신앙물이다. 또한 경계나 도로 표지의 역할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기능도 한다고 한다. 오보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오보 주위를 세 바퀴 돌고, 흩어진 돌을 주워 얹고, 그 위에 담배, 차, 돈 등을 올려놓는다. 이 같은 행위는 우리와 비슷하다.
  우리의 서낭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질병·재해 등을 막아주고, 한 해의 풍년을 염원하는 장소이자 신격 존재이기도 해서 마을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무당을 불러 서낭굿을 벌였다. 개인적으로는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헝겊이나 짚신 조각을 걸어놓기도 했다. 또한 통행인은 서낭을 지날 때 돌을 주워 던지거나 침을 뱉어 도로에 배회하는 악령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였으며, 정초에는 부녀자들이 간단한 제물을 차리고 가정의 무병무사를 빌었다. 그러나 서낭당 근처에는 제사 때가 아닌 평상시에는 접근하기를 꺼렸다. 이것은 만약 마을신에게 부정한 일을 저지르거나 금기를 어기는 일이 생기면 신벌(神罰)을 받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을신은 존경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존재였다.
 
▨ 서낭당에 얽힌 전설과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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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보이는 돌무더기에 돌을 올려놓거나 침을 뱉으면서 무언가를 기원하는 행동들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서낭당의 유래담은 다음의 전설을 통해 그 행동 배경을 알 수 있다.
  ‘석전 전설’은 조선 명종 초에 왜란에 대비하고자 고갯마루에 돌을 쌓은 것이 돌무더기인 서낭당이 되었다는 유래를 보여준다.
  그리고 ‘소진량 전설’은 ‘성조본가(成造本歌 : 성주풀이)’에 보이는 것으로 황우양이 천상의 공사 차 출타한 사이 간악한 소진량이 황우양의 처를 범하려다 실패하자, 그 처를 가두고 갖은 고초를 다 주었는데 마침 황우양이 돌아와 소진량을 벌하고 그의 처를 되찾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후 소진량을 길가의 서낭신으로 만들어 오가는 행인들의 더러운 침을 받게 하였고 황우양 부부는 성주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등금[소금] 장수 전설’은 옛날에 등금 장수가 딸을 데리고 마을을 전전하다 쓰러져 죽은 장소가 서낭당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때 돈 있는 사람은 가족의 평화, 행복, 장수 등을 위하여 나무에 백지, 비단 등을 걸어 놓아 등금 장수의 딸을 위로하고 ‘양밥해 준다(추운 사람에게 이불 덮어 주는 격)’하여 돌을 얹어 주고 귀신이 붙지 못하게 침을 세 번 뱉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서낭당의 전설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전해져오고 있다.
  그리고 강릉지역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인 강릉 단오제가 매년 행해진다. 단오제는 대관령 국사 성황당에서 시작되는데, 산신당과 성황당이 공존한다. 이곳 산신당에는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 지역이었던 강릉지역에서 김유신이 적을 물리치고 강릉지역을 지킴으로써 산신이 되어 이곳 사람들이 매년 산신제를 지낸다. 성황당에는 강릉 출신인 범일국사가 모셔져 있다. 설화에 의하면 학산 처녀가 태양이 비친 물을 먹고 12달 만에 아기를 낳았고, 처녀의 몸으로 애를 낳은 그는 학바위에 아이를 버리게 된다. 그러나 학들이 날아와 그 아이를 감싸고 보살펴 성장하게 된다. 아이는 자라서 자기의 탄생 비밀을 알게 되고 서라벌에 가서 공부를 하여 국사가 되는데 이가 범일국사이다. 그 후 범일국사는 고향에 돌아와 왜군을 물리치고 마을을 지켜 이곳의 서낭신이 된다. 그리하여 범일국사는 단오제의 주신(主神)이 되고 그의 부인인 정씨는 여국사서낭신이 되어 매년 음력 4월 15일에서 단오제가 끝나는 날까지 21일 동안 함께 모셔진다.
  이러한 전설과 설화들은 민중들에게 서낭당의 발생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부여하고 이를 재인식시킴으로써 서낭당에 대한 전승력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순환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 서낭제에 담긴 정서
  서낭당에서 올리는 제사는 서낭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올리는 중요한 의식이다. 신당 안에 모신 서낭은 마을 수호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마을 제사의 중심이 된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집권의 방편으로 정치에 관심 없는 백성들을 하나로 모아 다스리기 위해 유교의 이념과는 다른 서낭신앙을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서낭제는 온 동네의 축제이기도 했다. 또한 때때로 양반이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의 제사는 두 단계로 나뉘어, 처음에는 양반을 위해 유교적 제사가 치러지고 다음으로 성황굿이라는 무속적인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 후 양반 사대부들이 차차 미신으로 경계하며 참여하지 않으면서 무속행사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서낭신뿐만 아니라 풍요신과 질병신도 함께 모시면서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는 물론, 건강까지 기원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낭당은 보통 세 분의 신을 모신다. 주신인 서낭신 외에 농사 등을 돌봐주는 토지신, 역병 등을 물리치는 어역신을 모신다. 이는 다른 종교 등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세 분의 신이 공존하면서 역할 분담하여 서로 화합하면서 서민들의 기원을 들어준다. 필요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신을 모시는 곳이 많다. 이는 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서낭신이 된 경우도 있고,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설화를 만들어 서낭신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많은 서낭신을 모셔둠으로써 서낭신들이 역할에 맞게 서민들의 기원들을 들어주게끔 한 것을 보면 서민들의 애틋하고 절실한 정서가 엿보인다.
  또한 우리의 서낭신앙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신명에 대한 생각과 대접을 아주 중요시 한 것을 알 수 있다. 서민들은 서낭당에 신명들을 모시면서 신명에 대한 정성과 대접을 잘함으로써 그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서낭신앙의 의의
  서낭신앙에서 중요한 점은 이를 수용하고 신앙하여 온 민중들의 신앙 심리에서 찾을 수 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 마을 입구를 통해 드나들 수 있는 온갖 질병이나 재액의 방지를 위해 혹은 바라는 바의 성취를 위해 서민들은 정성껏 돌을 쌓아 올리고 나뭇가지에 천조각 등을 걸며 기원함으로써 불안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점이 서낭당 신앙의 전승 기반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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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 주민들은 서낭신에 대한 정기적인 제의를 통해 마을 전체와 관련된 내용들을 축원한다. 단지 제의를 지내는 것으로 기원 내용의 성취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마을을 대표하는 제관이 제의 기간 동안 정해진 금기를 준수하고 거기에 들이는 정성에 따라 결과가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제관만 금기를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 모두 역시 일정한 금기를 준수하여야만 신이 자신들의 기원을 받아들여 줄 것으로 여겼다.
  개인제(個人祭)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신앙 욕구의 충족과 공동제(公同祭)에서 보이는 역사성과 연대감의 부여로, 민간 신앙이 그 숱한 박해와 혁파책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이어져 오게 한 전승력의 기반이 되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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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기 이래로 백성들의 신앙으로 온전히 자리 잡은 서낭당은 오늘날까지 마을 어귀에 남아 이 땅을 지켜온 옛 조상들의 마음을 묵묵히 전해준다.
  종교가 그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볼 때 엄격하고 복잡한 귀족적 지식인층의 신앙 형태라면, 서낭당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기원할 수 있는 민간의 신앙, 원초적 신앙 형태이다. 당집을 보더라도 불교나 유교의 성전과는 달리 서민들처럼 소박하고 평범하다. 또한 서낭신은 그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과 기록 등에 의해 정해진다. 즉 서민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 사소한 사정이라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신격화하여 서낭신으로 모신다. 그리하여 서민들의 행복을 위해 그들의 기원을 받아들이며 그들과 늘 함께 하였다. 또한 여러 신을 함께 모심으로써 서낭당의 역할을 다하게 하는 화합의 정신까지도 보여준다.
  신앙에서 미신으로 인식되는 오늘날의 서낭당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을까. 세련되지 못한 형식과 내용의 투박함 때문에 그 가치의미가 평가 절하되고 있는 것이라면, 서민들의 내면에 면면이 자리 잡고 있는 서낭당의 존재의미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은 비록 사라져가며 그 흔적들만 남아 있지만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서낭당이야말로 우리의 민족신앙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옛 선조들의 정성을 담아온 서낭당에서 지금도 저마다의 소원을 빌고 있는 서민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참고문헌
ㆍ이희근, 『우리 민속신앙 이야기』, 여명미디어, 2002.
ㆍ김봉우, 『경남의 고갯길 서낭당』, 집문당, 1998.
ㆍ홍순석 외, 『우리 전통문화와의 만남』, 한국문화사, 2002.
ㆍ김경남, 『강릉지역 서낭당 연구』, 보고사, 2004.
ㆍ이호준, 『사라져가는 것들』, 다할미디어, 2010.
 
   

 <대순회보 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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