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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방면 김현덕 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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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01 조회2,3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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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다양한 분야에서 공적을 세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것은 세인들에게 이만저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초연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사람들의 업적 또한 숨은 흑진주와 같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누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더불어 공존·공영해야 할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숨은 주역들은 타인이 자기를 주목하던 하지 않던 간에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맡은 일을 해나가는 소[牛]와 같다. 이번 호에 인터뷰한 연합 수호 팀장 김현덕 선감이 그에 걸맞은 분이다. 한성 방면인 김현덕 선감은 1937년생으로, 1967년 7월 12일에 도에 입문하였고, 1996년 9월 25일 선감 임명을 모셨다.

 

Q 입도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 부근에 위치한 조그만 시골마을입니다. 우리네 시골마을이 그렇듯이 벼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교통수단도 그랬지만 농기구도 변변치 않아서 대다수 인력에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마을은 품앗이와 두레로 서로 나누고 도와가며 살림을 지켜왔습니다. 또한 집안의 대소사마저도 서로서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다른 마을에 비해 이웃 간의 정이 남달랐답니다.

 

이 시기에 뭐하나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촌부(村夫)인 제가 마을이장을 맡게 되었답니다. 이장을 맡으면서 제가 지켜 나갔던 것은 『효경(孝經)』의 ‘以敬事長卽順(공경으로 어른을 섬기면 모든 것이 순조롭다)’는 공자(孔子)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새로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을 대대로 내려온 풍습을 지켜 나간 것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참에 마을 일이라도 열심히 해서 화목한 마을을 꾸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투르지만 마을 일을 맡아 동분서주하다 보니 어느덧 농한기인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당시의 시골 겨울은 바쁜 현대와 달리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다. 뭔가 해보려는 젊은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집안에서 그저 움츠리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저 또한 농한기가 되면, 읍내의 친구들을 만나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회관에서 친한 형이 ‘사람은 소우주’라는 말을 모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우주에서 태어났기에 우주를 닮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접해본 적도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제 발걸음은 자연스레 그 사람에게로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왠지 모를 신비감과 흥미로움이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저로서는 딱히 무어라 말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저 그 이야기에 이끌려 내 내면의 무엇을 꼭 알고자 하는 욕구만이 꿈틀거릴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 접한 도담(道談)이었습니다. 그분과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도담을 듣게 되면서 입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농번기가 되면서 차츰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었고, 더구나 어머니께서 병환 중이라 입도(入道)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따가운 햇살 아래 매미의 울음소리가 농사꾼의 귓가를 맴돌 무렵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나가다, 그분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짜고짜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면서 밤에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제사를 지내야 하니까 쌀 서 되 서 홉(약 5kg)을 쪄서 백설기를 만들어 두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전 자전거를 돌렸습니다. 의심이나 궁금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집에 도착해서 안사람에게 무작정 떡을 준비해 달라고 했더니, 아무 불평 없이 준비를 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이윽고 밤이 되자, 제 집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아 도담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전 치성 준비에 바빠서 듣지는 못했지만, 그런데도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답니다. 새벽 1시 30분이 되어서, 저를 비롯해 식구들이 함께 입도치성을 모셨습니다. 이때가 1967년 7월 12일이었습니다.

 

Q 수도를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입도치성을 올린 후, 저에게는 교화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지금 조영철 선감이 당시 선사였고, 임중균 선감이 선무였습니다. 그 두 분이 매번 교화를 해줬습니다. 한 번씩 입도치성을 올리는 날이면, 지금은 작고하신 김영진 선감이 교화를 들려주셨답니다. 낮에는 마을이장 일과 제 논농사를 지었고, 밤에는 서로 모여 도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선각들에게 도움을 받아 다음날 보충하곤 했습니다. 더구나 도담을 들려줄 수 있는 자리가 생기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마을 외진 곳에 살고 있는 수반의 형님이 도담을 듣고 싶다고 해서, 밤늦게 그 집을 향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을에서 너무 외진 곳이다 보니 낮에도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그날따라 문득 다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드는 것이 아닙니까. 마침 선각인 조영철 선감이 동행을 해 주셔서, 그냥 무시하고 출발을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터라 서둘러 움직였습니다. 한참 논을 가로질러 가는데, 조영철 선감이 우두커니 서서 다음에 가면 안 되겠냐 하는 것입니다. 저 또한 내심 불안한 느낌이 들었던 참이어서, 그렇게 하시자고 했답니다. 막상 집에 돌아와서 라디오를 켜니, 간첩이 나타났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좀 더 듣다가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날 가려고 했던 그 형님 집 주변이 간첩이 출몰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급히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며, 애써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덕화라고 생각합니다.

 

일산에 작은 포덕소를 마련했을 때의 일입니다. 매번 농번기가 시작되면, 새벽 4시가 하루 일정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8시까지 논일을 마친 다음, 오후 4시까지 포덕소에서 사업과 교화를 듣는 것이 하루 일과였답니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집에 도착해서는 마을 일을 돌봤습니다. 이러한 저의 행동을 보고는 모두들 도깨비라고 했습니다. 제 논의 일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마을 일을 척척 해 놓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농사도 그랬고, 마을 일도, 포덕도 게을리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나로 인해 덕화손상을 시킨다는 생각이 떠올라 더 열심히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말 힘든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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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시는 국민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늘 당장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답니다. 그러한 시기에 도인들의 생활과 방면의 경제적 어려움은 오죽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도인들은 십시일반 정성을 쌓아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각은 저에게 납형일 겸 봉안치성을 모셔야 하는데, 지금 방면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전 무의식중에, 선뜻 정성을 올리겠다고 답변 드렸습니다. 막상 말을 꺼내 놓았지만, 제 자신은 무엇 하나 올릴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누님과 동생한테 지금 상황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흔쾌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나 고마웠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 말씀을 그저 믿고 따랐을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의심하는 두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참된 진리가 이곳 대순진리회에서 소생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Q 도전님 말씀이나 도장 공사에서 느낀 일들을 알려 주십시오.

 

도전님 분부를 직접 받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리사에서 도전님의 수발을 들던 선각[조영철 선감, 임중균 선감]과 포덕소(신대방동에 위치)의 살림을 뒷바라지하는 것으로 저의 정성을 대신하였습니다. 당시 선각의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거르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선각이 계신 곳에 찾아 다녔습니다.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막상 계신 곳에 다다르니 장정 두 사람이 겨우 다리를 펼 수 있는 크기인데다, 습기가 말도 못하게 심한 방이었습니다. 다만 있는 것이라고는 눅눅한 이불이 전부였습니다. 끼니를 밥 먹듯이 거르고 있는 실정이 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각 두 분을 모시고 국수집을 갔습니다. 당시 국수가 10원이었는데, 저희 3명이 실컷 먹을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이렇게 몇 달을 일산에서 포덕소로 선각을 뵈러 다니다, 중곡동에 도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공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저에게도 주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속적인 참여는 아니어도 여러 번 참여 하였습니다. 한 번하면 9일씩 일했습니다.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임원들에게 “이렇게 하면 좋겠냐. 아니면 저렇게 하면 좋겠냐?”라고 하셨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분부대로 일을 추진하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건물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하면 영락없이 일은 중단되었답니다.

 

또 한번은 제가 공사를 받들다 감동받은 일이 있습니다. 당시는 일일이 모래를 짊어 메고 옮겼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은 조에 있던 한 분이 도전님 용안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입니다. 내심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많으니, 닮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들은 이야기지만, 진짜 도전님 동생분이라는 겁니다. 타 종교의 지도자 식구들이라면 호의호식하고 편하게 지내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입니다. 그때서야 도전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진정으로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Q 현재 연합 수호 팀장을 맡고 계십니다.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도장에 수호를 들어와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입도한 세월만 오래되었지 내가 뭐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지나고 보니 제가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수도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그만 책임(연합 수호 팀장)을 맡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수호 팀장을 하면서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연합은 여러 방면이 모인 곳이라 수도인도 천층만층(千層萬層)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며칠을 고민해 봤습니다. 마침 『대순지침』에 “예(禮)라는 것은 공경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 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것…”이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처음 마을이장을 맡을 때, 가졌던 신념이 상대를 공경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먼저 낮추고, 상대를 공경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도 임원과 수반을 가리지 않고 제가 먼저 인사합니다. 그래서인지 연합 팀원들이 참 잘 따라 주셨습니다. 그분들이 잘 해주셨기에 10년 세월을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몇몇 에피소드가 있는데, 말씀을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한때 시봉들이 도장 주변을 산책하다, 연합 수호팀의 각 초소 자리를 보고 참 신기해했답니다. 그분들 말씀에 따르면 도전님께서 도장 주변을 산책하다 잠시 쉬면서 담배를 피우신 자리마다 각 초소가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떤 임원은 수호를 서다 깜박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갑자기 장수가 나타나서 “여기가 어디라고 졸고 있느냐”며, 막 호통을 치더랍니다. 놀라서 깨니까 아무도 없더라는 겁니다. 이번에는 수호 복장에 관한 것입니다. 꿈에서 단지 저희들의 운동복에 불과한 수호 복장이 그 꿈속에서는 갑옷이었답니다. 이 말들을 되새겨 보면, 사람이 했어도 다 신명계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예전에 도전님께서 “우리의 공부 중에서, 주문을 읽지 않는 공부가 수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현재 우리의 수호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임원들의 수호 교대가 있을 때마다 수호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줍니다. 한편으로는 수호팀 내적으로 주의를 당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말의 중요성입니다. 서로 다른 방면들이 모이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타 방면 수도인에게 곡해를 일으켜 전체를 와해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덕화손상이 됩니다. 그래서 연합 임원 서로서로가 주의를 하고, 수반들을 한 가족처럼 사랑하고 아끼며 나가고 있답니다. 이런 모습 때문인지 도장에서 수호를 서고 나면 많은 것을 배워 나간다고 합니다.

 

Q 젊은 수도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시대적인 차이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절에는 어른을 모시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밥상에 먼저 앉아 먹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존칭을 사용했습니다. 각자의 입장이 있고 생각이 있는데 제게 맞지 않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상대를 존중하면 나중에 그 결과가 자신에게 있어서 좋은 결실을 맺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무릇 옛 사람들은 도(道)를 닦지 않아도 그런 생활에 익숙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답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즘은 썩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수심연성이고 세기연질인데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수도에 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다음 은근과 끈기로 소와 같이 묵묵히 우리가 굳건히 각자의 소임을 다한다면 분명히 더욱더 발전하는 수도인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아울러 제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은 양위 상제님, 그리고 도전님의 덕화와 조상의 음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선각분들이 바른 길로 인도해 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이고요.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대순회보> 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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