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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방면 김정숙 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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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3.24 조회1,5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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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을 정(定)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偏僻)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變)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하며 만고(萬古)를 통(通)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經過)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期約)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限度)가 있어 정(定)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精誠)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케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대순진리회요람』 p.17)

 

위의 글을 떠올리게 하는 분은 경산계열의 종갓집이라 할 수 있는 경산 방면 책임 선감이신 김정숙 선감이다. 어떤 이는 발에 차이는 조그만 돌부리에도 불평하지만 어떤 이는 태산 앞에서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간다. 목적지와 신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정숙 선감은 끝까지 따라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도전님과 선각이 이끌어 주시는 대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기에 크고 작은 고비를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말씀과 그분의 수도과정을 통해서 도전님께서 『대순진리회요람』에 설명해 놓으신 신(信)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김정숙 선감은 1939년 10월 17일 의성에서 태어났고 1978년 10월 1일에 대구에서 입도했으며, 1985년 6월 18일에 선감 임명을 모셨다.

 

입도하신 경위와 수도하시게 된 과정을 말씀해 주세요.

 

당시 저는 슬하에 2남 1녀가 있었는데 초등학생인 막내를 가슴에 묻고 상실감이 커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저를 지켜보던 친구가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며 미륵불을 믿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팔공산 갓바위에 있는 미륵불께 정성을 드리러 다니고 있었으므로 친구에게 미륵불을 믿고 있지 않냐고 반문했더니 돌미륵이 아닌 인간 미륵을 믿어야 한다고 하면서 『전경』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입도치성을 모시면서 동시에 친구(현재 쌍문1 방면 선감)도 입도시켰습니다.

 

마음 둘 곳이 필요했던 저는 집에서 노느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마음에 날마다 포덕소에 갔습니다. 그러자 선각께서 저희 집에 와서 교화를 해주고 기도를 모셔주며 주문(呪文)을 외우라고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암기에 어려움을 느꼈으나 선각의 독려로 매일 시장 보러 갈 때마다 조금씩 외웠더니, 며칠 만에 다 외우게 되었습니다. ‘아! 이럴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의지를 갖고 정성 드리면 된다’는 것과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라는 작지만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조그마한 깨우침은 도전님과 선각의 가르침에 대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수도 자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수도생활을 열정적으로 하기로 마음먹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만인이 평등하게 잘사는 지상선경(地上仙境)이 열릴 것이며 예(禮)를 비롯한 인간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고(故) 경산 선감(정선덕 선감)의 교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나도 상제님 뜻을 잘 받들어 신선선녀(神仙仙女)가 꼭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 경산 선감께서 불고가사(不顧家事)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불고가사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여쭤 보았더니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고 도의 일만 부지런히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만사 다 잊은 채 상제님 도만 열심히 닦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등교 시킨 후, 날마다 포덕소에 가서 수도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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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축 당시의 수성회관

 

수도과정 중 기억에 남거나 보람을 느끼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입도 후 저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포덕소나 회실, 회관에 가는 일을 거른 적이 없습니다. 명절에는 물론이고 애들 결혼식 날도 회관에 먼저 들러 인사드린 후 예식에 참여했고 도장에서 행하는 각종 행사 및 공사에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도전님과 선각들이 가르쳐주고 이끌어 주시는 대로 행하다 보니 별 어려움 없이 포덕하고 수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종단에 분규사태가 났을 때, 방면에도 일이 생겨 사업이 주춤하게 되었고 지금은 상제님께 죄송스런 마음뿐입니다.

 

내수 시절, 제 위의 선각자들이 모두 떠나자 경산 선감께서 저에게 수성 방면01에서 사업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연락소에 출근하기 전에 아침밥을 지어놓고 나가서 온종일 돌아다니며 포덕했습니다. 당시는 통행금지도 있었고 입도치성도 축시(丑時: 새벽 1시)에만 할 수 있어서 입도치성 후, 그 집에서 자거나 교화를 하며 밤을 새웠습니다. 그러다가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사이렌이 울리면 집으로 와 밥을 해서 남편의 출근과 아이들의 등교를 돕고 그 길로 다시 나와 포덕했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일상이었고 일탈이란 없었습니다.

 

선무가 되자 경산 선감께서 수성 방면은 제 연운이 아니니 단독으로 사업을 하라고 하시면서 저에게 선사체의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경산 선감께서 상급임원들을 수의하시는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또 방면에서 치성 전수로 유과를 만들어 도장에 올리는데 선사 이상만 참여할 수 있는 그 일에 저도 참여했습니다.

 

어떤 때는 포덕을 한 달에 25호를 해야 치성에 참석할 수 있었으므로 치성에 참석하기 위해 한 달에 57호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때에 상관없이 입도치성을 모셔도 된다는 도전님의 분부에 따라 입도치성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도장 참배 덕을 많이 본 것 같습니다. 입도치성을 마치고 나면 의례히 대구에서 중곡동까지 참배를 갔습니다. 아침 7시에 출발해서 참배 마치고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었지만 이렇게 참배를 많이 다니다 보니 일이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정성 들여 길러낸 일꾼들이 공부 들어가고 공사를 받들며 도에 쓰일 때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저 또한 상급임원이 되어 여주본부도장, 포천수도장, 제수수련도장, 토성수련도장 공사를 받들었고 도전님을 모시고 여러 지역을 연수하면서 천지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특히 그림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던 제가 도전님의 지시에 따라 단청작업을 해내면서 도전님께서 기운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도의 일을 하다 보면 집을 비우는 일도 많았을 텐데 집안의 반대는 없었는지요?

 

도전님께서 항상 가화(家和)에 힘쓰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런 것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어 참으로 복이라 생각합니다. 친정과 시댁 모두 제가 아이를 잃은 상실감이 크다는 것을 아셨고 또한 헛된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시누이들은 도장 다녀왔냐고 물어보고 잘했다고 합니다. 남편 또한 수도는 하지 않지만, 도인들이 집에 오면 환대해 주었고 제가 하는 일에 협조했기에 며칠 또는 몇 개월씩 집을 비워야 하는 도의 일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었습니다. 상제님 일을 해서인지 자식들도 모두 장학금을 받고 다니며 대학교를 졸업했고 지금은 결혼해서 잘살고 있습니다.

 

경산 방면의 책임 선감이 되신 과정을 말씀해 주세요.

 

경산 선감께서 별세하자 도전님께서 “경산은 아무도 손대지 마라. 그대로 놔두고 너희들이 가서 교화를 해줘라.”고 하명하셔서 경산 선감 밑에서 사업하던 박○○02가 경산 방면의 책임자가 되었고 고령 선감[고(故) 김일준 선감], 안동 선감[고(故) 정훈봉 선감], 포항 선감[고(故) 천정술 선감] 등 여러분들이 오셔서 교화를 해주셨습니다. 당시 선사였던 저는 경산선감께서 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연운을 따지자면 고령 방면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03 하지만 경산을 그대로 두라는 도전님 분부에 따라 경산에 남아 박○○ 밑에서 사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상급임원 임명을 모실 때 도전님께서 제게는 호(號)를 내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몇 년 뒤, 제 앞에 후각들이 임명을 모실 때는 네 개의 방면에 모두 호를 주셨습니다. 당시 저는 도전님께서 제게 호를 주시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도전님께서 모습을 감추시고 박○○가 영대(靈臺)의 신위(神位)를 바꾸는 쪽에 서서 도장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경산 방면의 책임자였던 박○○가 나간 후, 제가 호를 받는 문제로 수임선감 분들께서 의논하신 결과 제가 호를 받게 되면 경산 방면과 경산계열이 없어지게 되므로 제게 호를 받지 말고 경산 방면을 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경산 방면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도전님께서 왜 제게 호를 주시지 않았는지 그 혜안(慧眼)에 감복하면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경산 방면의 수성회관에 성화(聖畵)를 모시게 된 경위와 치성물로 유과(油果)를 올리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동인동 회실에서 사업을 하다가 대구에 있는 도인들이 모두 화합하여 포항 방면과 함께 회관을 하나 지으려고 터를 샀습니다. 그런데 공사가 지연되자 도전님께서 작고하신 포항 선감에게 회관을 지으라고 하셔서 포항 방면에서 먼저 회관을 지었습니다. 저희 또한 회관을 짓고 성화를 모시라는 도전님의 분부를 모셨는데 대구지역에서는 경산만 성화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터를 사는 데 냈던 돈을 포항 방면에서 받아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을 사고 한 층을 더 올려 닫집을 모셨습니다. 도전님께서 정해주신 대로 벽화와 조각을 배치하여 아래층에 성화를 모셨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저희 방면 회관이 대구 수성구에 있으므로 수성회관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고 도장 참배가 어려운 도인들은 경산 방면 회관에 가서 참배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많은 도인이 참배를 왔으나 각 방면에서 버스를 구입한 뒤로는 도장으로 참배를 갔습니다.

 

도전님께서 또 분부하시길 경산계열(고령, 대구, 달성, 안동, 포항 등)04의 수임선감들에게 “경산이 제일 큰 집이니 너희들이 모두 치성에 참석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회관치성을 모시고 얼마 뒤 본부성을 모시러 갔는데 도전님께서 한 경산계열 수임선감에게 경산 방면 회관치성에 참석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 임원이 앞의 사람을 많이 보냈다고 하자 앞의 사람 100명이 가면 뭐하냐고 하시며 혼자 가더라도 그 임원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셔서 책임자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또 한번은 도전님께서 대구지역에 오셔서 성주 방면 회관에 가셨다가 저희 회관에 들르셨습니다. 차 한 잔을 드시고 한참을 앉아 계시면서 일꾼들을 격려하시고 제게 잘하고 있는지, 가화(家和)가 되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박○○가 제가 제일 잘하고 있으며 가화도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그럼 됐다고 하시며 대구 방면에 들른 후 가셨습니다.

 

언젠가 수성 선감이 도전님께 유과를 만들어 올렸는데 그것을 맛보신 도전님께서 앞으로 경산 방면에서 치성 때에 유과를 만들어 올리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선사 이상으로 구성된 전수원(奠需員) 8명이 유과를 만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기온이 올라가는 5~9월까지는 유과가 녹으므로 만들지 못하고 그 외의 기간에 유과를 만들어서 치성물로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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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과를 만드는 모습

 

수성회관을 수호하면서 도인들이 많이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도장에 신위문제로 사태가 났을 당시, 박○○가 중립을 지키자고 하기에 저는 신위를 바꿀 수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얼마 후, 박○○는 신위를 바꾸는 쪽에 가세했고 주문을 달리했습니다. 저는 도전님의 분부로 성화를 모셨고, 도전님의 성적(聖跡)이 담긴 회관을 그들에게 넘겨 난법난도(亂法亂道)의 장이 되도록 할 수 없었기에 어떻게든 회관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밥도 해먹을 수 없게 하여 방에서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먹으며 회관에 버티고 있었는데 도장에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게 되면 제 앞의 후각들을 함부로 대해 힘들게 했습니다. 회관치성 참석도 하지 못하게 해 아래층에서 서럽게 대기한 적도 있었고 기도를 모실 때, 주문이 다른 부분에서는 서로 소리를 높여 봉송했습니다. 그 와중에 제 앞의 일부 후각들이 회관을 포기하고 따로 회실이나 포덕소를 마련하여 나갔습니다.

 

그렇게 7년간 속 끓이며 신경을 써서인지 아픈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했던 제가 고혈압으로 영대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쪽에서도 견디기 힘들었는지 회관을 지으려고 마련했던 수성회관 바로 옆 터에 회관을 지어 나갔습니다. 나가면서 도장 사진과 성화를 달라고 했는데 다른 건 다 가져가도 도전님께서 해주신 성화는 줄 수 없다고 하자 성화를 제외하고 가전제품까지 다 가져갔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회관을 되찾았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으며 회관치성을 모실 때는 방면 도인들이 많이 울었습니다.

 

단순히 저희 회관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까지 많은 고통을 당하며 지키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회관이라 생각했고 도전님의 성적이 깃든 곳이라 여겼기에 모진 세월을 감내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상제님의 덕화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어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 전에 죄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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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고동락한 임원들과 함께

 

끝으로 도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해주십시오.

 

저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고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는 마음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도전님과 선각이 이끌어 주시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마음을 먹었기에 크고 작은 고비를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도전님께서도 늘 말씀하시길 일심자(一心者)가 되어야 앞으로 닥칠 겁액과 장애를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전님의 말씀을 앞의 도인들에게 바르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 중 하나가 가화를 이루고 이웃에게 모범을 보여 본보기가 되는 것이며 상제님의 덕화를 손상시킬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고 수도하는 데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전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심(一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뜻을 끝까지 받들겠다는 마음으로 도전님의 가르침을 잘 새기고 실천하여 우리 모두 운수마당에서 만나길 바랍니다.

  

<대순회보>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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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수성 방면 선감은 태극도 시절부터 수도하신 분으로 경산 선감과 아는 사이라 경산 선감 앞에서 사업하셨다.

02 도전님께서는 박00에게도 호를 주시지 않았다.

03 고(故) 경산 선감의 전도인(傳道人)이 고령 선감이다.

04 대구 선감과 고령 선감은 경산 선감의 선각이나, 두 사람이 사업을 하지 않았으므로 도전님께서 대구 방면과 고령 방면을 경산계열이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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