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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섬서성, 하남성 답사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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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재원 작성일2019.03.20 조회1,5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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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이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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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서성 유패(留)에 있는 장량묘(廟)의 장량전(殿)

 


  필자는 교무부의 연구위원 3명과 함께 지난 2007년 10월 9일부터 16일까지 7박 8일의 일정으로 중국 섬서성(陝西省)과 하남성(河南省) 일대를 다녀왔다. 이번 답사는 『대순회보』에 연재되고 있는 28수(宿) 신명(神明)과 다음 호부터 연재될 24절후(節) 신명 관련 자료 조사를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거명하신 인물들과 관련된 곳을 방문하여 이에 대한 자료 수집도 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남성 낙양(洛陽)의 관림(關林)과 맹진현(孟津縣)에 있는 광무제(光武帝)의 능(陵), 그리고 섬서성 서안(西安) 주변에 있는 당태종(唐太宗)의 능(陵)인 소릉(昭陵)과 장량(張良)의 사당, 강태공(姜太公)의 조어대(釣魚臺), 제갈량이 생을 마감한 오장원(五丈原), 노자(老子)가 『도덕경(道德經)』을 저술하고 강론한 누관대(樓觀臺), 주문왕과 무왕(武王)의 능인 주릉(周陵),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만난 홍문(鴻門) 등이 주된 방문지였다.


  이번 답사는 교무부가 기획하고 추진한 첫 번째 해외 답사였다. 우리 일행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보다도 기울인 노력에 상응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였다. 그러나 최종적인 평가는 이 글을 읽는 수도인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쪼록 3회에 걸쳐 연재될 답사기가 수도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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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공항 내부 

 

 

섬서성 서안(西安)으로 


  출발은 10월 9일 12시 45분 인천공항 발 서안행 비행기였다. 기내 방송을 들으니 인천에서 서안(西安)의 함양(咸陽)국제공항까지의 거리는 1,800km로 대략 2시간 30분이 소요되며 1시간의 시차(時差)가 발생한다고 했다. 


  출발 당시 인천 날씨는 매우 화창했다. 그런데 서안은 비가 오는데다 기온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주변의 간판에 중국식 한자(漢字)인 간체자(簡體字)가 보이고 중국어가 들리는 것 이외에는 이곳이 외국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은 외형상 차이를 느낄 수 없고 공항만을 놓고 본다면 별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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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공항에서 서안 시내까지 버스로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서안은 명(明)나라 때 정해진 이름으로 그 이전에는 줄곧 장안(長安)으로 불리던 곳이다. 그리고 공항의 이름이 함양인 것은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이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함양과 장안은 관중(關中)의 일정한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관중이란 지명에 대해서 살펴보자. 관중은 현재 섬서성(陝西省)과 위수(渭水)01 유역 일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역사서(歷史書)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때는 함곡관(函谷關) 서쪽의 땅으로 전국(戰國)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옛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 한중(漢中)과 파촉(巴蜀), 경우에 따라서는 섬서성 북부와 농서[西, 현재 감숙(甘肅省)의 별칭]를 포괄한다. 


  관중은 주변이 자연적인 요새로 둘러싸여 있으며 기름진 평원이 펼쳐져 있어서 진(秦), 한(漢), 당(唐)을 비롯한 13개의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정한 까닭에 3,000년의 도시 역사 중 절반 이상을 제국의 수도로 기능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관중과 섬서성이 중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답사기에서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02 


  시내로 들어가면서 보니 어느 쪽으로나 지평선을 볼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는데 간혹 동산처럼 솟아 있는 곳은 황제와 그 일족의 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중국의 건축물 대부분이 왜 벽돌로 이루어졌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흙 이외의 건축 재료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흔한 재료인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었고 이 벽돌이 주된 건축 재료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서안은 차도와 인도가 넓고 바둑판처럼 잘 정비되어 있었다. 또한 저녁에 종루(鐘樓), 고루(鼓樓)를 보러 갔었는데 종루와 고루가 옛 성곽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곳이 고도(古都)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시내 중심부는 곳곳에 청소부들이 배치되어 있어 깨끗했고 주요 건물에는 조명을 비춰 비가 오는 흐린 날씨였음에도 고도(古都)의 아름다움과 위용을 엿볼 수 있었다. 이렇듯이 도시의 면모를 새롭게 한 것은 중국 정부가 서안을 10대 중점도시로 지정하여 서부의 중심도시로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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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원스럽게 뻗어 있는 서안 시내 도로

 

 

400년 한(漢)나라의 기반이 된 한중(漢中) - 배장단과 한중박물관 


  10월 10일. 간밤에 내린 비가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6시 준비된 차에 올라 한중(漢中)으로 출발하였다. 서안에서 한중까지는 최근에 개통된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른 시간이고 최근에 개통한 도로라서 그런지 차량이 드물었는데 화물차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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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장단 내부 안내도

 

 

  서안을 떠나 40~50km 지나서 산과 계곡이 이어지면서 도로의 경사와 굴곡이 심해서 일행이 탄 차량은 시속 80km 이상의 속도를 내지 못했다. 서안을 떠나 약 3시간 30분 정도 걸려 한중에 도착했다. 한중은 서안에 비하면 아직은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 많았다. 한중이란 명칭은 이곳에 흐르는 장강(長江)의 지류, 한수(漢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03은 BC 206년 한왕(漢王)으로 봉해지면서 그 당시 남정(南鄭)으로 불리던 이곳에 도읍하였다. 이로써 한(漢)이라는 국호(國號)가 정해지게 된 것이다. 


  유방은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04의 위세에 눌려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진(反秦)의 기치 아래 모인 봉기군(蜂起軍)에게 명목상 실권자는 초회왕(楚懷王)이었다. 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함양으로 진격하라고 명하면서 제후들에게 관중(關中)에 먼저 입성하는 자를 그곳의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 유방이 이끈 군대가 먼저 함양에 입성했으므로 초회왕의 약속대로라면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는 것이 순리였다. 하지만 유방의 군대는 10만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뒤따라 온 40만 항우의 군대에 맞설 힘이 없었다. 따라서 항우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우가 패권을 잡았지만 명목상의 실권자인 초회왕이 제후들에게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따라서 한중(漢中)도 관중이란 논리로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하고 진(秦)에서 항복한 장수인 장함(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를 삼진(三秦)의 왕으로 봉하여 유방을 감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중에서의 첫 번째 방문지인 배장단(拜將壇)은 한 고조가 한신(韓信, ?~BC 196)을 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의식을 치른 곳이다. 그런데 공사 중으로 관람 불가였다. 하필이면 이때 공사 중이라니 참으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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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부 수리중인 배장단

 

 

  『전경』을 보면 상제님께서 한신에 대해 말씀하신 구절이 있다. “한신(韓信)은 한 고조(漢高祖)의 퇴사 식지(推食食之)와 탈의 의지(脫衣衣之)의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徹)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은 한신이 한 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 고조가 한신을 저버린 것이다.”(교법 2장 49절)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한신과 한 고조의 인연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 열전(列傳)」을 통해 살펴보자. 젊은 시절 한신은 남에게 빌붙어 사는 처지였다. 그는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늘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그에게 어떤 백정이 “배짱이 있다면 그 칼로 날 찌르고 그렇지 않다면 내 바짓 가랑이 밑을 기어 나가라.”고 도발(挑發)하였다. 그는 그 순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단순히 한 사내를 죽여 죄인의 신분이 되기 위해 자신이 살아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을까? 한신은 자신을 모욕한 백정의 가랑이 밑을 태연히 지나갔고 이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산 일이 있는데 이를 과하지욕(下之辱)이라고 한다. 


  한신은 초왕(楚王)이 되고 나서 어려운 시절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보답하였다. 또한 자신을 모욕한 백정을 중위(中尉 : 치안을 담당하는 무관)로 임명하였다. 이때 한신은 참는 것을 배웠기에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보복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한신의 행위를 볼 때 그는 무략(武略)만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처음에는 항우를 따랐으나 여러 번 올린 그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 고조를 따르게 되었는데 이때 소하(蕭何)05를 만나게 된다. 소하는 한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한 고조에게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였고 마침내 한신은 대장(大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배장단이 설치된 것은 소하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왕[한왕(漢王), 즉 유방(劉邦)]께서 평소에 오만무례하셔서 지금 대장을 제수함이 마치 어린아이 부르듯이 하시니, 이와 같은 이유로 한신이 떠난 것입니다. 왕께서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시려 한다면 좋은 날을 골라 재계(齋戒) 하시고 단장(壇場)을 설치하여 의식을 갖추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사기』 「회음후(淮陰侯) 열전(列傳)」 ) 

 

 
  이렇게 하여 단이 설치되고 모든 장수들을 모이게 하였는데 장수들은 서로 자신이 대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신이 대장이 되니 모두가 놀랐다고 한다. 


  교법 2장 49절의 ‘퇴사 식지’와 ‘탈의 의지’는 한 고조가 한신을 대장으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힘을 실어준 것을 표현한 것이다. 최고실권자가 신임(新任) 대장에게 자신이 먹을 밥을 돌리고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줌으로써 신임(信任)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한(漢)의 대장이 된 한신은 잔도(棧道)06를 수리하고 진창(陳倉)으로 진격하여 삼진(三秦)을 정벌하는 것으로 항우와의 결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그의 지위가 제왕(齊王)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한신의 책사(策士)였던 괴철은 초패왕 항우, 한왕 유방과 함께 천하를 삼분(三分)하여 통치한다면 제후들이 따를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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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도 축조 방법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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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도 모형의 일부

 

 

  이때 한신이 괴철의 계책을 따랐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병권(兵權)을 맡겨 준 한 고조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초패왕 밑에서 그는 집극랑(執戟郞, 경호원)에 불과했다. 그리고 초(楚)에서는 자신의 의견조차 수용되지 않았던 그가 한(漢)에서는 대장(大將)이 되어 제후(諸侯)의 반열에 오른 것은 순전히 한 고조의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한신으로서는 아무리 눈앞에 이익이 보이는 상황이라고 해도 끝내 한 고조를 배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신의 이런 행위를 보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견리사의(見利思義). 그는 이(利)를 보고서 의(義)를 생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신은 해하(垓下)에서 초패왕을 꺾고 전쟁을 마무리하였지만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라고 상제님께서는 한신을 위로하신 것이다. 이렇게 상제님의 위로를 받은 인물도 드문데, 눈앞의 이익을 보고도 의를 생각한 그의 행위를 상제님께서 높이 평가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신의 일을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인 한중박물관(漢中博物館)으로 향했다. 한중박물관은 한왕의 궁성이 있던 자리였고 이후로도 주로 행정관서가 있던 곳이었는데 1958년 박물관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도 잘 꾸며져 있어 아담한 중국 정원의 멋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리고 주변보다 조금 높은 곳이어서 관망하기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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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박물관(漢中博物館)

 

 

  여러 전시실 중에서도 포사고잔도진열실(褒斜古棧道陳列室)은 인상적이었다. 포사고잔도에 대해 살펴보면 이때 포(褒)는 한중(漢中)에서 조금 북쪽에 있는 포중(褒中), 현재의 포성(褒城)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후 무관(武關)을 거쳐 사곡관(斜谷關)까지의 길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斜) 사곡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곳을 지나면 미현(眉縣)에 이르게 되는데 미현에서 제갈량이 최후를 맞이한 오장원(五丈原)은 멀지 않다.


  또한, 잔도(棧道)는 길이 없는 곳에 다리를 놓아 통로로 쓴 것을 의미한다. 먼저 절벽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도리(집, 다리 등을 세울 때에 기둥 위에 건너질러 위의 물체를 받치는 나무)를 끼워 넣는다. 이때 구멍 속에는 오똑하게 나온 부분을 만들어서 도리가 빠지지 않게 한다. 다음으로 그 도리를 기둥으로 받치고 판자를 깔아 길을 만드는 것이다. 포사고잔도진열실에는 이 잔도를 축소한 모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중국에서 본 여러 가지 전시물 가운데서도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였다.

 

 


장량의 사당이 있는 자백산(紫柏山) 


  다음의 행선지는 유패(留)였다. 이곳은 장량의 묘(廟) 즉 사당(祠堂)이 있는 곳이다. 한중을 출발하여 산 속으로 이어지는 길의 연속이었다. 이 길은 장량의 사당을 거쳐 다음 행선지인 대산관유적지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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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량의 사당 입구

 

 

  하필이면 이런 깊은 산 중에 장량(張良, ?~BC 168)의 사당이 있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전에 먼저 장량에 대해서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한신, 소하와 함께 서한(西漢) 3걸(傑)로 꼽히는 장량은 전국(戰國) 7웅(雄)의 하나였던 한(韓)나라 재상가(宰相家) 출신으로 본래 성(姓)은 주(周)나라 왕실과 같은 희(姬)씨이다. 그러나 한(韓)이 진(秦)에 의해 멸망하게 되자 그 원수(怨讐)를 갚을 것을 맹세하고 자객을 사서 진시황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성과 이름을 장량으로 바꾸고 전전하던 중 황석공(黃石公)이라는 신비의 노인을 만나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얻게 되고 그로부터 장차 제왕(帝王)의 스승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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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장량은 한 고조를 도와 한(漢)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되었고 그에 대해서 한 고조는 “장막 안에서 계책을 운용하여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하니 이것은 모두 자방의 공로”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후(留侯)로 책봉되고 나서 그 이상의 지위를 바라지 않았고 자신에게 올 수도 있는 재상의 자리를 소하(蕭何)에게 양보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깨끗하게 물러난다. 


  이렇게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장량은 적송자(赤松子)08와 같이 신선이 되기를 원했다. 그의 사당이 있는 자백산(紫柏山)은 적송자가 수도를 통해 신선이 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장량도 이곳에서 벽곡(穀)09을 하면서 수련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장량이 죽은 뒤에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그를 ‘상국신선(相國神仙)’, ‘영웅신선(英雄神仙)’이라 칭했으며 이곳에 그의 사당을 지어 기념했다.


  이런 이유로 장량의 사당이 건립된 한대(漢代) 이래 그의 사당은 이 지역 도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후한(後漢)말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일으켜 한중에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한 장로(張魯)는 자신이 장량의 후손이라고 자칭하였고 이때 가장 번성하였다고 한다.


  장량의 사당은 낡았지만 전체적인 규모는 작지 않았다. 「한장유후사(漢張留侯祠)」란 패방(牌坊)10을 들어서면 작은 다리가 있다. 장량이 황석공(黃石公)에게 신발을 신겨 주는 그림이 이 다리가 여기 있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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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량전

 

 

  그리고 본전(本殿)인 장량전(張良殿)으로 가기 전에 보이는 ‘공성신퇴(功成身退)’, 이 글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는 ‘공수신퇴(功遂身退)’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지이영지 불여기이 (持而盈之 不如其已) 

지니고서 그것을 채우는 것은 때에 그침만 같지 못하고 

췌이절지 불가장보 (而之 不可長保) 

갈아 그것을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존할 길이 없다 

금옥만당 막지능수 (金玉滿堂 莫之能守) 

금과 옥이 집을 가득 채우면 그를 지킬 길이 없고 

부귀이교 자유기구 (富貴而驕 自遺其咎) 

돈 많고 지위 높아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 뿐 

공수신퇴 천지도 (功遂身退 天之道)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제님께서 자방(子房)의 종용(從容)을 본받으라고11 말씀하신 것은 이와 같은 장량의 처신 때문은 아니었을까.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끝까지 그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예는 역사적으로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이 연장선에서 한(漢)의 성립에 공을 세운 많은 인물들도 제대로 된 최후를 맞은 사람이 드물지 않은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량의 처신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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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량전 앞의 공성신퇴

 

 

한중(漢中) 출입의 인후(咽喉) - 대산관 유적지 


  다음의 여정은 대산관(大散關) 유적지였다. 그러나 산중의 도로는 겨우 2차선이었고 계속적인 비로 곳곳에서 바위와 토사가 도로를 막았다. 게다가 이 길은 한중과 보계(寶鷄)를 잇는 주요 도로인 까닭에 다니는 차량이 많아서 한번 막히면 일반도로 못지않게 교통체증이 심했다. 기사 말로는 여의치 않으면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한다고 했다. 정말 이러다가는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국 사람들의 그 만만디[漫漫的]라니. 중국에서는 아무도 급한 사람이 없는 듯했다. 이는 서안 시내 횡단보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신호가 바뀌었다고 뛰는 사람은 우리 일행밖에 없었다. 그래도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는데 긍정적으로 보면 여유가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이 산중에서 길이 막히자 운전자나 경찰이나 도로복구를 위해 투입된 인원이나 분위기로 보면 모두 야유회라도 나온 사람들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우리 차량의 기사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정된 시간에 서안으로 돌아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므로 어떻게든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고자 했고 그 덕분에 여러 번 막힌 도로를 헤쳐 나올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너무나도 중국적이지 않은 이 중국 기사의 고군분투(孤軍奮鬪)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일행은 점심을 먹지 못했다. 산중 도로에 음식점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이렇게 시간이 지체된 까닭으로 도저히 점심을 챙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전날에 긴 여정을 생각하여 과일과 주전부리를 산 것이 있어 그것으로 요기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모습이 군사들이 행군하면서 전투식량으로 요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은 촉군(蜀軍)의 진격로가 아닌가. 한중부터 장량 묘(廟)를 거쳐 보계(寶鷄), 즉 진창(陳倉)까지. 그렇다 우리는 지금 228년 제갈량의 2차 북벌(北伐) 진격로인 진창도(陳倉道)를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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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험준한 산세였다. 차를 타고 가는 것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하물며 군대를 운용하는데 어려움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실감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장졸들의 노고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도착한 대산관은 참으로 허무했다. 간단한 안내판과 관문이 전부였고 더군다나 관문은 닫혀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가 아니라 이미 닫아 놓은 지 오래인 것 같았다. 별수 없이 안내문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산관은 산관(散關)이라고도 한다. 중국 팔대(八大) 관문(關門)의 하나이며 파촉(巴蜀)과 한중(漢中) 출입에서 인후(咽喉)에 해당하는 곳으로 서주(西周) 때 산국(散國)의 소재지이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인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70여 차례나 있던 곳이다. 기원전 206년 한왕(漢王) 유방(劉邦)은 한신의 계책을 채용하여 “잔도(棧道)를 수리하여 몰래 진창(陳倉)을 넘는다”는 고사(故事)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또한 촉(蜀) 후주(後主) 건흥(建興) 6년(228년) 제갈량은 산관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하기도 했다. 산관은 서한(西漢)때 만들어졌고 역대(歷代)로 수리되었으며 1985년 정비, 중건되었다. 

 

 
  이 날의 일정은 이것으로 마감하고 보계(寶鷄)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아쉬웠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안내문 하나 비석 하나가 전부인 곳도 있고, 어떤 곳은 그나마도 지도에 표시된 것이 전부인 곳도 있다. 이런 현장을 접하고 나면 그 나머지는 현재를 사는 우리의 상상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본 유적(遺蹟)들이 그 옛날에도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은퇴한 이후가 아닌 그들의 현역시절을 생각하면서 살을 붙이고 그 역사적인 장면을 떠올리는 것 또한 답사에서는 중요한 일이 된다. 따라서 단지 역사적인 현장에 갔었다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 대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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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산관 관문(關門)

 

 


01 위하(渭河)라고도 한다. 강의 길이는 약 800km이고 유역 면적은 13만㎢로 감숙성(甘肅省) 남동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섬서성을 거쳐 황하(黃河)에 합류한다.

02 「중화(中華)의 본고장, 섬서성을 둘러보고 1편」, 『대순회보』 74호, pp. 56~69 참조.

03 유방(劉邦, BC 247?~BC 195) 한(漢)나라 1대 황제(재위 BC 202~BC 195) 진나라 말기에 군사를 일으켜 진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4년간에 걸친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승리하여 BC 202년 한나라를 건국하였다.(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04 항우(項羽, BC 232~BC 202) BC 209년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으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봉기하여 진군을 도처에서 무찌르고 관중(關中)에 들어가 앞서 들어와 있던 유방을 복속시키고 팽성(彭城)에 도읍하여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으로 칭하였다. 이후 해하(垓下)에서 한왕(漢王) 유방에게 포위되어 자살하였다.(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05 소하(蕭何, ?~BC 193) 한 고조 유방의 재상으로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에 입성하였을 때 진(秦) 승상부(丞相府) 중요 문서를 입수하여 한(漢) 왕조 경영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유방과 항우의 싸움에서는 관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므로 고조가 즉위할 때에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공신이라 하여 찬후(侯)로 봉해지고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다. (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06 험한 산골짜기에 나무를 평평하게 늘어놓아 만든 다리.

07 요코야마 미쓰테루, 『만화 史記』 14, 대현출판사, 1999, p.120 참조.

08 전설 속의 신선. 신농씨(神農氏) 때의 우사(雨師)로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았으며 곤륜산(崑崙山)에 이르러 늘 서왕모(西王母)의 석실에 들어가 비바람을 타고 놀았다고 한다. 

09 오곡(五穀)을 먹지 않는 도가(道家)의 양생술(養生術).

10 충신이나 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세우는 정문(旌門).

11 천지 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 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하나니 공명지 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 종용(子房之從容)을 본 받으라. (교법 3장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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