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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예시 84절 한시(漢詩)의 전거(典據)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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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작성일2020.06.23 조회1,573회 댓글0건

본문

 

『전경』 예시 84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七八年間古國城 畵中天地一餠成

    黑衣飜北風千里 白日傾西夜五更

    東起靑雲空有影 南來赤豹忽無聲

    虎兎龍蛇相會日 無辜人民萬一生

이라고 옛글을 외워주셨도다.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외워주신 옛글인 위의 7언(七言) 율시(律詩)는 난해하여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없다. 또한 예시(豫示)에 수록된 비결(秘訣)이기에 잘못 해석하면 자칫 혹세무민(惑世誣民)이 될 수 있다. 본 글의 목적은 이 한시(漢詩)를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제님께서 인용하신 위의 한시가 원래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각에서 이 한시가 『정감록(鄭鑑錄)』에 수록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상제님께서 『정감록』을 인용하셨다고 주장하고 있기에 사실 여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정감록』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다. 실존 인물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심(李沁), 이연(李淵) 형제와 정감(鄭鑑)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풍수 사상에 근거하여 국가 운명과 생민존망(生民存亡)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급속도로 유포된 이유는 현 왕조인 조선이 망하고 정씨에 의해 계룡산을 도읍으로 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는 역성(易姓)혁명의 반체제적 비결 내용 때문이었다.

  위 한시가 『정감록』에 있는지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 겨레에서 정 감(鄭堪)을 없앴는데도 세상에서 정 감의 노래가 사라지지 아니하기에 혹시 이(李)씨가 정(鄭)씨의 화를 받을까 염려스러워 이제 그 살을 풀고자 이씨의 기운을 돋우고 정씨의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았노라”(권지 2장 29절)는 『전경』 구절 때문이다. 이 구절은 상제님께서 정감의 노래, 즉 ‘『정감록』’에 대해 부정적이셨음을 알려준다. 상제님께서 “정씨(鄭氏)가 몸을 붙여 일을 벌일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교법 3장 39절), “동서양이 통일하게 될 터인데 계룡산에 건국하여 무슨 일을 하리오.”(교법 3장 40절)라고 하신 말씀을 보아도 정감의 비결, 즉 『정감록』에 대해 부정적이셨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상제님께서는 『정감록』을 잘못된 비결이라고 하셨기에 만약 예시 84절이 상제님께서 『정감록』에 수록된 한시를 종도들에게 외워주신 것이라면 『정감록』에 대한 상제님의 가르침은 일견 모순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각의 주장처럼 예시 84절의 시가 『정감록』에 수록되어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정확한 것인가? 사실 상제님께서 외워주신 위의 한시와 몇 글자 차이가 있는 유사한 시는 현재 통상 『정감록』으로 지칭되고 있는 비결 모음집 대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위의 한시가 『정감록』에 수록되어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틀린 주장이다. 이 시가 실제 『정감록』에 편입되고 『정감록』으로 대중에 알려진 시기는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이후인 일제 강점기이기 때문이다. 이를 추적해 보자.

 

 

<삼도봉시>와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정감록』 판본 

 

  『전경』 예시 84절의 한시와 유사한 시 중 가장 온전한 형태의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삼도봉시(三道逢詩)’라는 제목을 지닌 비결에 수록되어 있다. 해당 시와 유사한 부분은 <삼도봉시>라는 비결의 마지막 부분이다. <삼도봉시>는 비결시 중에서는 가장 난해한 시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남아있는 전문은 아래와 같다. 마지막의 8구가 『전경』 한시와 유사하지만 10여 글자에 차이가 있어 뜻은 많이 달라진다.

 

 

 三道相逢益友三  淸談三夜坐三三     天道胡然移極五  人彛沆復斁綱三

 先丙八年壬後七  後辛四月戌先三     一着碁翻那定一  三分鼎沸必遷三

 四木七金埋六六  二弓五矢發三三     千楸風雨烏門八  萬壑雲烟兎窟三

 九九宮行離後九  三三門路艮先三     五星福地宮尋四  一日災年節驗三

 丹心故國忠無二  白首深山樂有三     論三百計無全十  愧我翁年六十三

 六八運餘故國城  畵中天地一餠成     黑衣飄北風千里  白鷁登西夜五更

 東起靑雲空抱影  南來赤幟暗無聲     龍蛇虎兎相催世  無罪人民萬一生

 

 

 

  <삼도봉시>는 현재 『정감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문헌들 속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로 상제님께서 『정감록』의 시를 인용하셨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만약 상제님께서 <삼도봉시>의 마지막 8구를 몇 글자 바꾸면서 인용하신 것이라 가정하더라도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삼도봉시>가 『정감록』에 편입되어 『정감록』의 일부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시점은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이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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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도봉시>라는 한시가 필사가 아닌 정식으로 처음 활자화되어 출판된 것은 1923년이다. 일본인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1886~1934)가 1923년 2월에 일본의 도쿄, 즉 동경에서 출판한 『비결집록(秘訣輯錄)』에 처음 수록되어 출판된 것이다.01 이 책의 표제는 『비결집록』이지만 당시에나 현재까지도 『정감록』 또는 『정감록비결집록(鄭鑑錄秘訣輯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같은 해 3월 김용주라는 이에 의해 서울에서 발행된 『정감록』이 처음이다.02 그해 4월에는 비결에 대한 설명과 비평을 곁들인 『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이 현병주라는 이에 의해 출판되는데 여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1923년 출판된 이 세 종의 책들을 비교 분석하면 거의 동일한 문헌을 기초로 한 24~25가지의 비결을 공통으로 수록하고 여기에 각자 자신들이 수집한 비결을 추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24~25가지 비결들의 저본(底本)이 되는 문헌은 무엇일까?  

  그 저본으로 추측되는 문헌은 호소이의 『비결집록』, 즉 『정감록』과 그 내용이 거의 동일한 필사본으로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 되어있는 『비결집록』[아유가이 판본]이라는 고문서다.03 그 필사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13년 이전의 것이 분명하다. 동일한 내용으로 편집방식까지 일치하는 필사본이 1913년 2월 이전에 분명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일한 필사본에 대해 1913년 2월 간략한 설명인 해제를 달아 권두에 추가한 문헌 자료가 현재도 남아있어 명확히 입증된다.04

  해제가 추가된 이 필사본의 등사판이 현재 일본의 동경대학과 한국의 부산대학에 소장되어 있는데 해제를 단 사람은 일본인 관변학자인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이다.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러일전쟁에도 관여했다고 알려진 그는 필사본 『秘訣輯錄(비결집록)』에 대한 일종의 주석을 앞쪽에 추가하면서 『정감록』으로 명명한다.05 당시 대부분 비결집 권두는 <정감록> 또는 그 이본들이 차지했기에 아유가이는 비슷한 비결집들을 모두 ‘정감록’으로 규정한 것이다.

  아유가이는 자신이 『정감록』으로 명명한 『秘訣輯錄(비결집록)』[아유가이 판본]을 조선총독부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에 소장되어 있던 여러 비결서와 비교 검토하여 내용의 차이를 분석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서 당시 총독부에 이미 적어도 총 7권의 비결서가 소장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가 필사본 『비결집록』의 여러 여백에 남긴 메모로 알 수 있는데 메모에 따른다면 당시 총독부 학무과에는 『정감록』, 『무학비기(無學秘記)』, 『도선비결(道宣秘訣)』, 『북창비결(北窓秘訣)』,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서산대사비결(西山大師秘訣)』, 『서계가장결(西溪家藏訣)』의 7가지 비결서가 각각 독립된 문헌으로 존재했다. 실제로 이 비결서들은 총독부에서 경성제대 그리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 규장각으로 이관되어 현재도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여기에 더해 아유가이의 메모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과 『두사총비결(杜師聰秘訣)』이 총독부 도서로 더 확인된다. 결국, 1913년 당시 적어도 총 9가지의 독립된 비결서가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오늘날 통상 『정감록』으로 지칭되는 대부분의 비결은 1913년 이전에는 각각의 여러 비결서들을 하나로 묶어 비결 모음서[『秘訣輯錄(비결집록)』]라고 지칭하거나 아니면 권두의 비결을 제목으로 하여 소장되다가, 1920년대 이후 활자화되면서 『정감록』으로 명명된 것들이다. 즉 다양한 비결들이 모두 『정감록』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일제와 이에 동조하던 일본 관변학자들이 비결서에 대한 민중들의 신앙을 이용하여 한일 강제 병합을 정당화하거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여러 비결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하나로 묶인 비결들을 모두 『정감록』으로 지칭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외워주신 예시 84절 한시를 추적해 보자. 아유가이는 자신이 ‘정감록’으로 명명한 『비결집록』 27번째 장 앞면의 <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 제목 아래 “학무과 분실의 장서(藏書) 『서계가장결』과 동일해서 <삼도봉시>와 <서계이선생가장결>을 포함한다.”는 메모를 남겼다. 즉 <경주이선생가장결>·<삼도봉시>·<서계이선생가장결>을 합치면 『서계가장결』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남아있는 문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00여 년 전인 1913년 아유가이는 『전경』 한시의 원형으로 추측되는 <삼도봉시>가 『정감록』이 아닌 『서계가장결』이라는 비결서에 수록되어 있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계가장결』은 어떤 문헌인가?

 

 

『서계가장결』의 저자 

 

  『서계가장결』은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이 후손들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적어 놓은 비결로 통상 알려져 있다. 현재 대부분의 비결서들이 그 지은이를 가탁(假託)하여 비결의 제목을 정했다고 평가되는 반면 『서계가장결』은 서계가 지은 것이라 평가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서계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기에 『서계가장결』은 『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로 불리기도 하는데 어떠한 이유에서 서계 이득윤이 『서계가장결』의 실제 지은이라고 말해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서계집(西溪集)』06 등을 통해 본 그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그의 자는 극흠(克欽)으로 서계는 이득윤의 호다. 선생은 1553년(명종 8) 현재의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석화리에서 부(父), 이잠(李潛, 1528~1575)과 진주 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려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9세손으로 원래의 이름은 덕윤(德胤)인데 개명하여 득윤(得胤)이 되었다. 그의 가문이 청주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증조(曾祖)인 창평공 이공린(李公麟, ?~?)이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의 딸과 결혼한 후 처의 고향으로 이거(移居)하여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증조와 조부가 모두 여러 사화에 연좌되어 고초를 겪은 바 있어 그의 부(父)는 공직생활보다 학문에 전념하는 가풍을 전했다. 어려서는 미수 허목의 스승 정구(鄭逑, 1543~1620)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하다 약관의 나이를 넘자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문인이며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제자인 서기(徐起, 1523~1591)와 박지화(朴枝華, 1513~1592)를 직접 찾아가 그들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78년 26세의 서계와 토론한 서기는 놀라서 “학문으로 우리나라에 이름난 자가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리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박지화(朴枝華)에게는 역학(易學)을 배워 당대에는 박지화와 함께 역학(易學)의 쌍벽으로 일컬어졌다고 전해지는데 박지화는 항상 사사로이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세간에 학문에 뜻을 둔 자가 어이 한정이 있으리오. 그렇지만 역학(易學)에 마음을 두고 두루 깨닫고 정미한 자는 서계만 한 이가 없다.”라고 하였다.

  1588년(선조 21) 연로하신 어머님을 위해 36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에 급제하고 1597년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지만,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다가 1600년(선조 33)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고 1602년 주역(周易)의 주를 교정하기 위한 설국(設局)이 있자 역학(易學)에 밝은 자를 가려 그 일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우선하여 선발되어 참여하였다. 1604년 공조 좌랑(工曹佐郎)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형조(刑曹)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듬해인 1604년 52세에 의성 현령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어 선조로부터 표리(表裏)07 한 벌을 하사받았다.

  광해군 때는 국사가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1607년 낙향하여 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옥화리의 옥화대(玉華臺)에서 역학(易學)을 닦았다. 당시 서계는 송시열의 스승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 등과 교류하며 역학과 음악을 토론하였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선공감(繕工監)의 정(正)이 되고, 1624년 그의 나이 72세에 괴산군수로 부임하여 이괄(李适, 1587~1624)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관기(官紀)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627년 정묘호란에는 노구로서 의병을 모아 난의 평정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78세에 타계하는데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다.08

  이상에서 상술한 그의 생애를 통해 본다면 그의 학문, 특히 역학(易學)은 당대 최고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그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을 모두 겪으면서도 도의(道義)로써 난에 슬기롭게 대처했음을 볼 수 있는데 그의 경지를 추측할 수 있는 일화가 조선왕조실록과 묘갈명(墓碣銘)에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괴산 군수(槐山郡守) 이득윤(李得胤)이 죽었다. 처음의 이름은 덕윤(德胤)이고 자는 극흠(克欽)으로 경주인(慶州人)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행이 있었다. 반정 초에 공조 정랑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왔다가 뒤에 괴산군수로 제수되었다. 서울에 와 사은하는 길에 도성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직도 쇳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으니, 난리가 끝이 안 났다.” 하였는데, 정묘년에 이르러 그가 한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槐山郡守李得胤卒。初名德胤, 字克欽, 慶州人。少好學, 有孝行。反正初, 拜工曹正郞, 承召而至, 後授槐山郡守。詣京謝恩, 聞城中語音, 謂人曰: "金聲猶盛, 難未艾也。" 至丁卯, 言果驗。]

(조선왕조실록 인조 8년 (1630) 5월 28일)

 

 

내가 계해년 겨울 예문관(藝文館)에 있을 때 일찍이 공의 상소를 보았는데 비록 상세하지 않지만 대략 오음(五音)으로 사람들을 살피니 조화를 잃어 변란이 있을까 두렵다는 내용이었다. 역적 이괄(李适)의 반역 기미가 없을 때였기에 이를 마음속으로 괴이하다 생각했다. [且余於癸亥冬。忝翰苑。甞見公䟽。雖未詳記。而盖以五音。察於人人。聲失其和。恐有變亂。未幾賊适反。心竊異之。] 

(이경석09이 쓴 서계 묘갈명, 『서계선생문집』 4권)

 

 

  위의 일화는 서계가 역학에서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 현재의 기미(幾微)로 미래를 예지하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던 기인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를 통해 본다면 서계가 난을 피할 방법을 후손에게 알리기 위해 『서계가장결』이라는 비결을 저술했다는 주장은 상당한 개연성을 지닌다. 『서계가장결』 끝부분에 “略陳來事 以曉後生 一念在玆須從此示(간략히 앞일을 늘어놓으니 후손들에게 일러주어 일념으로 잊지 말고 반드시 이 가르침을 따르라)”라는 글은 다른 비결들과는 달리 『서계가장결』이 가탁이 아닌 서계가 직접 지은 비결일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고 할 것이다. 

  『서계가장결』은 전체적으로 풀이가 어려운 비결 특유의 난해성을 띠고 있는데 『정감록』 등과 유사점도 있다. 하지만 말세의 징후를 전쟁에서 찾는 『정감록』과는 달리 전염병과 자연재해에서 찾는다는 점, 그리고 부지런히 농사를 짓는 것이 말세를 헤쳐나가는 최고의 방법이라 주장하는 점에서 다른 비결들과 궤를 달리한다.10 이런 점에서도 이 비결은 서계의 저작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결국, 『전경』 예시 84절의 한시는 일각의 주장처럼 상제님께서 『정감록』에서 인용하신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한시는 서계 이득윤이 지었다고 추측되는 비결시이며 상제님 재세시에는 『서계가장결』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 외워주신 옛글은 바로 『서계가장결』의 <삼도봉시> 마지막 8구이며 천지공사의 도수를 보시며 몇 글자를 바꾸신 것이다. 역학의 대가로 뛰어난 예지력을 지녔었다고 알려진 서계가 지은 비결시이기에 원래 그 담고 있는 의미를 쉽게 알 수 없음이 당연한데 이에 더해 상제님께서 이를 천지공사에 쓰시며 변화시키셨기에 아마 그 현묘한 비밀을 풀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추후 이에 대한 더 심화된 연구가 진행되어 이 시가 과연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작은 실마리라도 나오기를 기대하며 글을 끝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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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안춘근 편, 『鄭鑑錄集成』 8(서울: 亞細亞文化社, 1981), p.871 참조. 

02 백승종,  「[예언으로 읽는 우리 역사-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0) - 현대판 정본 정감록의 배후를 찾아라」, 《서울신문》, 2005.5.26, 26면 참조.

03 『秘訣輯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서고 청구기호: (古書) 奎 7568]

04 백승종, 앞의 글 참조.

05 『鄭鑑錄』 (1913) [일본 동경대학 도서관 소장 등사판 청구기호: 漢籍小倉 44771), 『鄭鑑錄解題』 (1913) [부산대학도서관 소장 등사본 청구기호: OMO 3-10 4] 참조.

06 『서계선생문집』이라고도 한다. 이득윤의 시문집으로 6세손 정연이 산일(散逸)되었던 유고(遺稿)를 모아, 풍산 홍석주에게 교정을 부탁하여 1833년(순조 33) 초봄에 출간한 것이다. 그 경위는 홍석주의 서(序)와 6세손 정연의 발(跋)에서 대략을 알 수 있다.

07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거나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옷의 겉감과 안감.

08 이득윤에 생애에 대한 정보는 『서계선생문집』의 행장과 묘갈명, 규장각의 『서계가장결』 『서계선생문집』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이득윤, 그리고 다음의 문헌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다. 이종관, 청주 사림의 학맥과 서계 이득윤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Journal of the Korea Academia-Industrial cooperation Society Vol. 16, No. 2 pp. 1092-1100, 2015

09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은 조선 중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0 백승종,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9) 이득윤과 ‘서계이선생가장결’」, 《서울신문》, 2005.07.28 26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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